Politics & Movie: V for Vendetta (2006)

MuzeWeek/Culture 2012.01.22 02:27

= Freedom, Forever! =


“Remember, remember, the 5th of November,
the gunpowder treason and plot.
I know of no reason why the gunpowder treason
should ever be forgot.”

           V for Vendetta (2006)는 Alan Moore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근접한 미래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로 주제는 바로 “파시즘에 대한 저항(resistance)과 자유의 회복을 위한 아나키즘”에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나 독일 제3제국 나치당을 연상시키는 파시스트 정당 Norsefire가 영국 의회를 장악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영국 사회를 철저히 고립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다진다. (Norsefire는 현재 영국의 극우 정당인 The National Front에서 착안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부의 위협이란 원작에서는 핵전쟁 이후 세계 대부분의 파멸과 방사능 오염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바이러스 등의 “생화학적 위협과 테러리즘”으로 그 형태가 바뀐다. 그리고 V는, 제임스 1세에 대한 카톨릭 신자들의 실패한 암살 기도였던 1605년 Gunpowder Plot에서 영국 상원 의회를 폭파할 목적으로 폭약을 운반하다 체포된 Guy Fawkes를 형상화한 마스크를 쓰고 Norsefire 파시스트 정부에 맞서 싸우는 인물이다. 그는 사실상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의 안정을 뒤흔들어 놓는데,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다. 아나키즘 vs. 파시즘. 과연 자유는 어디에서 얻어지고, 그 자유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독일의 나치 당에서 착안한 만큼, Norsefire당은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와 결합된 전형적인 전체주의 독재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들의 모토는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이고, 마치 나치 경례가 “Sieg Heil!”이었던 것처럼 그들의 경례는 “England Prevails!”이다. 그들이 장악한 정부 조직은 “눈(the eye, 감시 부서)”, “입(the mouth, 선전 선동)”, “손가락(the finger, 비밀 경찰)” 등으로 나뉘고, 재미있는 것은 미국을 “the former United States”라고 칭하는 등 미국이 내전에 돌입해 있어 더 이상 미국 유일의 패권에 의해 세계 질서가 유지될 수 없는 홉스식 무정부상태에 놓인 국제체제를 암시한다. Norsefire의 당수인 Adam Sutler는 아돌프 히틀러와 British Union of Fascists의 창시자였던 Oswald Mosley를 섞어놓은 듯, 검은 셔츠를 입고 카리스마적 열변을 토하는 등 전형적인 파시스트 지도자(Big Brother)의 모습을 보인다. Norsefire 치하의 영국은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는다는 구실로 외부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그 안에서는 개인의 삶이 정치권력에 의해 일거수일투족 감시 당하고 구조적인 인권 탄압에 노출되어 있는 디스토피아다. 여주인공인 Evey가 통금시간이 지나서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비밀 경찰인 “The Finger”들에 발각되어 강간 당할 뻔한 것을 V가 구출한다. 그 이외에도 Guy Fawkes 마스크를 쓰고 Norsefire당의 선전물에 V의 표식을 그리던 어린아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등 전체주의 독재 하에서 상상 가능한 모든 극단적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 싸우는 V는 어떤 방식으로 아나키즘을 행사하고 있는가? 원작에서든 영화에서든, 관객들은 그의 얼굴이나 원래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고, 영국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배포하는 등 스스로가 이른바 “얼굴 없는 대중”, 혹은 정체성과 사상(idea) 그 자체의 형상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V는 결국 폭정에 대한 저항(resistance) 그 자체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폭압의 형태에서는 현대 정치적 의미로 인종 차별, 동성애 핍박, 종교 탄압 등을 목격할 수 있었다. 혹자는 V가 폭력에 맞서 폭력을 사용하는 테러리스트일 뿐이고 선량한 시민들을 격양시키는 위험한 선동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이 영화가 현실보다는 현실과 역사의 경험에서 차용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 “정부를 전복시키자”는 등의 급진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은 오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11월 5일 의회 광장에 모여달라는 V의 메시지에 Guy Fawkes 마스크를 착용한 영국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영국 의회로 행진하는데, 그것을 가로 막고 있던 계엄군은 그들에게 발포하지 못하고 결국 통과시키고 만다. 그런데 시민들이 모여서 한 것은 의회에 불을 지르거나 파시스트 정부를 제압하는 피의 혁명이 아닌, 이미 사람들이 텅 빈 의회 건물이 폭파됨과 동시에 그 위로 울려 퍼지는 불꽃놀이를 즐기는 것이었다. 이는 현재까지 매년 11월 5일 Guy Fawkes Night (Bonfire Night)에 장작불을 피우고 폭죽을 쏘아 올리는 영국의 풍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V의 아나키즘은 단순히 정부의 전복을 위한 것이 아닌, 영국 시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유의 전통”(English Liberty)을 회복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던 것이다.

           V for Vendetta를 보면서 당연히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그 레지스탕스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Jean Moulin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나치전선에 대항했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였는데, 전쟁 동안 이룬 영웅적인 업적과 죽음은 그를 Charles De Gaulle, Philippe Leclerc de Hauteclocque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만들었다.[각주:1]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 나치군은 일반인 학살 만행을 무마시키려 했고 그에게 동조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를 거부한 Jean Moulin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출옥한 이후 그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운동가들의 의견을 한데 모으고 화합을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대 이래로 프랑스만큼 좌우대립, 상호 불신이 증폭된 사회는 없었다. 각 레지스탕스 단체들은 비록 독일점령의 부당함에 맞서서 저항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긴 했지만, 상호분열이라는 관성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Jean Moulin의 사명이란, 이 같은 레지스탕스 내부의 분열, 고립, 분파성을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전국적인 지하 저항조직을 결성하여 이 모든 것들을 Charles De Gaulle 의 깃발 아래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길은 매우 험난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계열의 저항운동 지도자들은 극단적으로 야심에 차서 자기중심적이고, 정치적 신념도 달라 서로를 경계했다. 그들은 지하에 잠복 중이었고, 같은 조직이라도 내부에 그 주도권을 놓고 조직 내 계파간의 권력투쟁도 심했다. 이렇게 혼돈 상황에 있는 저항운동을 하나의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규합한다는 것은 정밀한 기술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Jean Moulin은 설득력, 성실성,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행정 경험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그의 사명을 실현해 나갔다. 그는 특유의 성실성, 설득력, 조직능력을 무기로 남부 프랑스 전역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라는 애국적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그 결과 레지스탕스 전국 위원회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된 것이다.[각주:2] 그는 후에 밀고로 인하여 1943년 독일군에게 다시 체포되었고, 베를린 이송 중 행해진 극심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체는 찾지 못하였으나 1964년 유명한 추도사와 함께 프랑스 국립묘지인 Pantheon 지하에 안치됐다.

           그와 그의 행적을 로마 시대의 초기 기독교 운동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다.[각주:3] Jean Moulin의 사명이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정적이었고, 그 스스로가 레지스탕스라는 프랑스 해방이라는 애국적 복음운동의 교황 베드로이자, 복음의 전파자 사도 바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에 Christianity를 탄압한 것이 로마제국이었다면, 독일 강점기에 프랑스인을 탄압한 것은 제3제국이라는 대유.) 1943년에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함을 통해, 그의 모든 영광을 그의 스승인 Charles De Gaulle에게 돌렸고, 드골은 이후 대통령이 되어 Jean Moulin을 프랑스 공화국의 위대한 사람들이 영원히 안식하는 Pantheon에 바쳤다는 논리이다. 그를 성자화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프랑스인들의 감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면, 우리는 다음으로 우리들 안에 살았던 저항의 아이콘인 안중근 의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안암동의 K모 대학을 찾은 외국인 교수는 그를 테러리스트로 소개하여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과연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을까.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며,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라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밝히고 있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8년에는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2차례 진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각주:4]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맞는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하얼빈 역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고,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각주:5]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에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등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격려했다.[각주:6]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 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 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이미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고 한다.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이론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에 대항할 수 있는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7] 안중근 의사는 따라서 V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적 방법론을 동원했을 뿐 아나키스트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아나키즘을 차용해 폭정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고, 따라서 현대의 테러리스트와 구분 지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극도의 국가주의(statism)에 물들어 있는 파시즘에 균형을 잡기 위해서 또 한쪽의 극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현재 자유의 삶을 누리는 우리들은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란, 공짜가 아니니까.

“Freedom is not free.”

  1. BBC, “Historic Figures”, http://www.bbc.co.uk/history/historic_figures/moulin_jean.shtml, 2010.12.13. 검색 [본문으로]
  2. Patrick Marnham, The Death of Jean Moulin: Biography of a Ghost, (Pimlico. 2001), p. 104 [본문으로]
  3. Le 13e arrondissement de Paris, “장 물랭, 레지스탕스 운동의 베드로이자 사도 바울”,http://kk1234ang.egloos.com/2653059 2010.12.13. 검색 [본문으로]
  4.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2) p.33 [본문으로]
  5. 유석재, “열 걸음 앞 이토에 3발 명중… 러시아어(語)로 한국 만세! 3번 외쳐”, 조선일보, 2008.10.24 일자 [본문으로]
  6. 허윤희 "안중근 의사는 애국정신 상징 중국(中國)혁명 과정에 지속적 영향", 조선일보, 2009.08.04 일자 [본문으로]
  7. 배영대,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관점서도 선구적 사상”, 중앙일보, 2009.10.23 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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