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 Movie: 13 Days (2000)

MuzeWeek/Culture 2011. 12. 8. 00:45

= Thirteen Days of Political Bargaining =
 

               Thirteen Days (2000)는 1962년 10월에 약 2주간에 걸쳐 있었던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를 맞닥뜨린 케네디 행정부와 미 정치 관료들이 정책결정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는가를 백악관의 관점에서 자세히 짚어간다. 인류역사상 가장 핵전쟁에 가깝게 다가갔던 사건이라고 평가되는 쿠바 미사일 위기는 국제관계에 있어 국가 간의 소통의 부재, 합리적 판단의 전제 등이 위기상황을 고조시키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단순히 “합리적 행위자”로서의 국가에 의한 정책결정이라기 보다는 내부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서의 대외정책결정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킨다. Graham Allison과 같은 학자는 크게 3가지 모델(합리적 선택 모델, 조직 과정 모델, 관료 정치 모델)을 제시해 쿠바 마사일 위기 사태를 분석한 바 있어 이를 차용한다.

               합리적 선택 모델이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국가를 유기체로 인식하여 서로가 합리적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가정하에 움직이고 반응한다는 것으로, 국제관계의 대표적 이론인 현실주의(Realism)적 전제에 가깝다. 모든 국가는 그들의 국가적 이익(raison d’état)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위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소련은 미국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에 가로막혀 그 돌파구를 찾고 있었으며, 미국이 터키의 미사일 기지를 확보하고 있음으로 가지는 우위를 뒤집기 위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한 것뿐이다. 이에 대한 미국의 선택지를 따져보면,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라는 측면에서 별 의미가 없기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기, 외교적 압력 행사, 쿠바 전면 침공, 미사일 기지에 대한 공습, 해상봉쇄 등이 있는데, 결국 이 중 무력충돌로 인한 핵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해상봉쇄를 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Allison은 위의 모델로는 모든 양상을 다 설명할 수 없다면서 조직 과정 모델과 관료 정치 모델을 제시한다. 조직 과정 모델은 정부를 단일한 행위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명력을 지닌 부서들의 모임으로 간주하는데, 이 부서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와 그를 위한 서로 다른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 표준행동절차)를 가진다. 가령, 후에 공습과 해상봉쇄 2가지로 대응방안이 좁혀졌는데, 공군 측의 SOP에 따르면 공습이 당연한 것이고, 해군 역시 그들의 SOP에 따라 Quarantine보다는 더 강력한 해상봉쇄를 원했던 것이다. (그 이외에도 CIA의 SOP도 영향을 미친다.) 정책결정과정은 이러한 각 부서의 SOP가 조율 조정되는 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관료 정치 모델 역시 유사하나 각 부서 및 부서장들간의 거래와 타협의 산물로서 정책결정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케이스에서는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장군들과 그 여파를 감안하는 온건한 장관들의 대치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Bay of Pigs 사건의 실패를 만회하고 소련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이길 원하는 장군들과, 핵전쟁으로의 확산을 두려워한 맥나마라 국방장관, 혹은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야 하면서도 전쟁을 시작한 행정부라는 오명을 남길 수는 없다는 케네디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서, 그 타협점이 된 것이 바로 해상봉쇄라는 것이다.

               이렇게 한 국가의 위기 상황 속 정책결정에 있어서 국제 레벨뿐 아니라 국내에서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견해 차이, 각 부서의 존재이유에서 나오는 입장 차이, 혹은 각 정책결정자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서의 타협 등이 모두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론적으로 이 위기가 핵전쟁으로 치닫지 않고 끝났기에 이러한 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단 하나의 충돌이라도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외교정책 결정과정을 연구함에 있어 무조건 국가를 하나의 단일한 합리적 행위자로 규정짓기보다는, 그 내부의 정치적 상호작용과 거래의 양상을 고려해 다각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냉전시기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살펴봄은 다름아닌 현재 북한과 대치중인 대한민국의 대북 정책 결정 과정의 분석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첫째 사례로서 1999년 6월 발발한 제1차 연평해전(서해교전)을 보자면, 이는 1999년 6월 15일 북한 경비정이 NLL(북방한계선)을 넘어 선제 공격하였고, 남한 해군이 대응하여 북한 어뢰정 1척을 침몰,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는 승리를 거둔 교전이다. 이 교전의 의미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 정규군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첫 사건인 동시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한창 시행 중이던 시점이라는 데에 있다. 김용호 교수에 의하면 이 사건 역시 Allison의 3가지 모델을 적용해 분석해볼 수 있다. 합리적 선택 모델로 바라보았을 경우, 북한의 NLL월선행위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것이 강력한 국방의지와 병행되고 있는지를 시험해봄과 동시에, NLL을 무력화하여 서해상에서 유리한 해상입지를 확보하고자 한 합리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1]

               반면 조직 과정 모델을 적용해 살펴본다면 당시 외보안보 관련 부서들이 김대중 대통령이 내세운 햇볕정책에 대체로 부정적 입장을 지녔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볼 수 있다. 각 행정부서별로 북한에 대한 입장이 바뀔 수 있는데, 가장 단적인 예로 통일부와 국방부가 이러한 위기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은 그 수장의 정치적 견해에 상관없이 거의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외교안보 관련 부서들에서 있어 북한의 NLL월선행위가 꽃게잡이 철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일 것이라는 분석이 실무진 단계에서 묵살당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반면 온건한 입장을 지닌 부서들은 햇볕정책의 성패를 최우선시했기 때문에 NLL이 가지는 전략적, 안보적 의미를 간과하고 가급적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려 했다. 이렇게 같은 행정부 내에서도 그 부서의 존재의미(raison d'être)에 따라 대응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용호 교수는 다음으로 관료 정치 모델에 있어서 당시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존재에 주목한다. 사실 제1차 연평해전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98년 6월에도 북한의 NLL월선사건은 있었으나, 당시 외교안보수석의 자리에 있었던 임동원의 대통령에 대한 직접 보고 덕에 해군 간의 직접적인 무력충돌은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통일부장관으로 지명돼 청와대를 떠난 이후 발생한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에 있어서는 그가 통일부장관이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위기상황의 대응과정에 있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온건한 목소리를 내던 그가 정책결정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자 강경대응방침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끊임없이 부정적 여론에 부딪혀야 했던 햇볕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에 강경한 대응을 결정하여 그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정치적 부담감을 해소하려 했다는 분석 역시 가능하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역시 이러한 강경한 태도가 가지는 대내적, 대외적 메시지가 햇볕정책과 맞물려 얻어진 결과라는 것이다.[각주:2]

               조금 더 최근의 사례로 우리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라 접근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이 격침되어 침몰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한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인도네시아 70여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각주:3] 이러한 조사 결과 발표는 미국과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며. 안보리는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각주:4] 그러나 북한이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며 부인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북한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에 이르지는 못했다.[각주:5]

               천안함은 사실 위에서 살펴본 제1차 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함정 중 하나로서, 그 상징성이 여타 군함들과 차이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이 사건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북한의 군사도발로서 북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북한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북 선박이 우리 해역, 해상 교통로 이용을 불가하고 남북간 교역을 중단하는 조처를 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덧붙여 “우리의 영해, 영공, 영토를 무력 침범 시 즉각 자위권 발동, UN안전보장이사회 회부 및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의 책임을 요구 할 것이다. 또한, 군 전력 및 한미 연합 방어태세를 한층 강화할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현재의 시점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실질적 제재를 가한 사실은 없으며,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에 있어서도 역시 여러 레벨의 분석수준을 적용해볼 수 있는데, 먼저 국제 레벨에서의 합리적 결정 모델을 살펴본다면 북한의 도발은 김씨 일가의 정권 유지와 김정은으로의 승계구도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2010년 8월 당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에게 “(김)정은이 무리하게 화폐개혁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천안함 사건을 일으켰다. 정은이 아직 얼굴이 알려진 시점도 아닌데 왜 이것을 묵인했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각주:6] 즉, 군 경력이 전무한 김정은이 권력 승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천안함 사건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도발 행위는 겉으로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북한의 생존보다 김씨 정권의 생존 유지라는 측면에서 계산된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다.

               국내 레벨에서 조직 과정 모델 및 관료 정치 모델을 적용해 대한민국의 대응 과정을 살펴보자면, 먼저 해군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 여론을 들 수 있다. 사건 전후로 북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령 사건 당시 천안함에서 SOP에 따라 “어뢰 피격으로 판단된다”고 2함대사령부에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부는 이 사실을 합참 등 상급기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방장관은 사건 발생 9일 후에서야 어뢰 피격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2010년 6월 2일 지방 선거에서 “북풍”이라 하여 이 사태로 인한 이명박 정부의 안보정책이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었는데, 이명박 정부가 강경한 목소리를 냈었던 것도 이 선거를 염두 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방선거 패배 이후 현재까지 이명박 정부는 강경했던 발언과 다르게 실질적인 대북제재를 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며, 이는 국내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국회와 여론의 동의를 쉽게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안함 사태는 북한의 도발에 대한 남한의 대응이라는 단적인 레벨이 아닌 여러 수준에 걸쳐 분석해볼 수 있는 사건이고, 앞으로 그 조율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김용호, 「세계화시대 국제관계: 동아시아적 이해」 (서울: 도서출판 오름, 2006), pp. 36-37. [본문으로]
  2. 위의 책, pp. 38-39. [본문으로]
  3. “합조단 "천안함, 북 어뢰 폭발로 침몰"”, 연합뉴스 2010.05.19 일자 [본문으로]
  4. 정우상, “'對北조치' 이후 한반도, 우군없는 北… '천안함 외교전' 완패”, 조선일보 2010.05.31 일자 [본문으로]
  5. 노효동, “<안보리 '천안함 의장성명' 내용과 의미>”, 연합뉴스 2010.07.09 일자 [본문으로]
  6. 신은진, "김정남, 訪中 김정일에 '천안함' 항의", 조선일보 2010.10.15 일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