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학 입문 : Punk Generation 101

MuzeWeek/Entertainment 2007. 11. 27. 22:40
From 'The 70's Show' 1x22 - 하이드가 말하는 펑크의 정의 :
Hyde : I just met the most amazing woman, Chrissy. And she just ditched her entire life to start over in New York, man. (나 방금 진짜 괜찮은 애 만났다, 크리시라고.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뉴욕에서 새로 시작할거래.)
Eric : Wait. Why is she going to New York? (잠깐, 뉴욕엔 왜 가는데?)
Hyde : She's going to start a punk band. (펑크 밴드를 만들거라는데.)
Fez : A punk band. Cool. What is punk anyways? (펑크 밴드 좋지. 펑크가 뭐야 근데?)
Hyde : Punk is the nihilistic outcry...against the corporate rock and roll takeover.
          It's the soundtrack to the revolution, man.

"펑크란 상업적 락앤롤의 점령에 대항하는 허무주의적 외침이지. 혁명의 음악말야."[각주:1]

Aim the heart

Green Day

1.
         나는 음악의 전문가가 아니다. 많은 이들보다 좀더 음악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들보다 더 많은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이 글도 이제껏 미루어왔던, 수많은 것들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루고만 있을 수 없기에, 나의 수많은 구상들이 그 기록을 남기기 전에 사라져버렸듯이 흘려보낼 수는 없기에, 비 내리는 새해의 새벽에 여기 와 있다.[각주:2] 나는 펑크(punk)를 좋아한다. 펑크는 굉장히 독특한 음악의 분류이면서도,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 엄청나게 상반된 의견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역시 그 잡설들 중 하나에 지날지 모른다.

         많은 이들은 음악을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 듣곤 하지만, 난 대부분의 경우 음악은 합법적 마약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 혹은 좀더 나은 무엇인가를 구상하기 위해 음악의 힘을 빌리고, 그 영감들 중 몇몇은 다시 음악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적어도, 몇분의 혹은 몇시간의 일탈과 안식을 제공해준다. 누군가, 아니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왔다. "노래란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현명하고, 성스러운 것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수많은 종교들이 그들만의 찬가를 지니고, 음악이란 매체를 통해 신, 과거의 유령, 구성원 사이의 교감을 꾀해왔던 이유일지 모른다. 그리고 수많은 "좋은 시"들이 음악을 동반하여 노래의 형태로 진화되었던 이유일지 모른다. 난 이 말에 특히 반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아름다운 매체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처음 의도된 바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They never grow up

Blink 182

2.
         펑크에 앞서, 넓은 의미에서 락(rock music)을 생각해보자. 많은 이들이 락은 단지 시끄럽고 단순한 쾌락을 위한 음악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앞의 문장에서 락대신 펑크를 넣어 읽어도 별로 현실과 다르지 않다. (정말 어이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rock과 樂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락을 어떻게 생각하든지와 상관없이, 락이란 비주류에서 시작했다. 물론 락이란 장르가 스테이크 썰듯이 깔끔하게 다른 장르들과 구별되지 않고, 너무나도 의미가 포괄적이라 많은 사람들이 두리뭉실한 느낌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락음악(rock music)은 주류에 저항하는 마이너의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 수록 더이상 락을 비주류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락스타 (rock star)라는 어원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들도 생겨났지만, 적어도 락을 정의하는데 있어 생략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단어는 바로 "저항(anti-establishment)"이란 이야기이다. 그리고 락의 수많은 하위장르들 중에서, 펑크락(punk rock)이야 말로 가장 그 근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펑크는 저항의 음악이다. 60~70년대 소위 히피들이 공유하는 것과는, 또 80년대 이후 헤비메탈, 하드코어 예찬론자들이 공유하는 것과는, 그리고 90년대 이후 힙합 및 거리의 전사들이 공유하던 것과는 성격상에서 전혀 다른 저항이다. 태고 이래로 항상 음악과 시가는 저항의 매체로 사용되어 왔다. 곡은 그것을 쓴 이의 감정을 대변하고, 5000년이 넘는 인류 역사에 있어 한가지 확실한건,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순간은 단 1초도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음악과 장르, 가사들과 구절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저항의 성격을 띄면 음악은 그것을 증폭시켜준다. 그리고 모든 장르에 걸쳐 저항이란 모티브가 나타날 수 있지만, 현시대에 있어 그것의 가장 뛰어난 운반체는 펑크락이다. 그럼 도대제 어떤 종류의 저항인가. 물론 펑크락의 저항정신이 가장 '투철'하다거나 이런 얘길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또라이들의 행진이라고밖에 보여지지 않는 것이 펑크니까 말이다.

         그럼 펑크의 저항(anti-establishment)이란 어떤 형태인가. 그것은 단순히 기성에의 반발, 권력에의 저항, 진보에의 갈망 등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이들도 많고, 대표적으로는 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저항은 가사에 꼭 "fuck the authority"가 포함되어야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브이포벤데타(V For Vendetta, 2005)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을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영화 Equilibrium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억제함으로 인해 완벽하고 더 진보된 사회를 이룩한다는 설정이 등장하고, 그 억제된 감정을 되살리는 것, 즉,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감미함으로써의 저항을 이야기한다. 감정이란 단순히 더 위대한 것에 나아감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불편한 부가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 혹은 감성이 없는 인류란 더이상 나아갈 곳도 없음이 당연한 것 아닌가. 감정은 수많은 오류와 실수, 실패를 낳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수습하지 않는 것이 잘못일 뿐. 따라서 Equilibrium은 감성의 부활을 저항의 수단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솔직히 거창하게 이야기하니 저렇게 쓰여지는 것이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즐김으로써 저항하라"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저항은 언제나 숭고하고, 장엄하고 희생을 동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즐기라니? 바로 네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란 얘기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리듬에 맞춰 움직이거나 어깨를 들썩이지 않는 이는 없다. 만약 어떤 것을 진정으로 음미하고 있고 즐기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솔직하라는 이야기이다. 왜냐면 권력을 가진 이들이 혹은 기성세력을 이루는 이들이 통제할 수 없는 최후의 것이 바로 '감정, 느낌, 쾌락'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충실함으로써 기성에 저항한다. 이것이 바로 펑크의 저항정신이다.

Crossover

Offspring

3.
         사실 시작할 때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펑크에도 여러가지 분류가 있다. 하지만, 간략한 소개를 위해 아주 단순화 시켜보도록 하겠다. 펑크의 원류는 70년대부터 있어왔고, 프로토펑크(protopunk)[각주:3]에 영향을 받아 탄생하게 소위 Original Punk는 90년대부터 싹튼 neo punk (pop punk)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물론 저항의 개념에 있어서 그 둘은 크게 다른 점이 없긴 하지만, 그 방식은 구분지어야 한다. 70년대 펑크에 비교해서 네오펑크는 좀더 그네들의 삶의 이야기에 치우쳐 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진짜 이건 무늬만 펑크고 내용은 말랑말랑한 팝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네오펑크 밴드도 상당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골수펑크론자들과는 다르게, 네오펑크가 펑크의 의미를 계승하지 못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네오펑크는 자신들의 감정에 더 충실했을 뿐이라고 본다. 펑크는 무조건 시끄러워야 하고, 무조건 기성에 반발하는 내용을 담아야하고, 무조건 신나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오만한 편견에 불과하다. (실제로 팝펑크가 2000년 이후 거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락장르에 속하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거대한 철학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길어봐야 10분정도의 짧은 곡에 그네들의 메세지를 담는데 능했을 뿐이다. 그 메세지는 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그것은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만약 어떤 곡을 듣는 어떤 이도 음악가의 메세지를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독백이고 어느 미친이의 헛소리에 불과하지 않는다. 물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음악을 음미하는가의 숫자의 문제는 상관이 없지만, 단 한명의 영혼이라도 그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음악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네오펑크는 솔직하다. 다른 장르들에 비해 뛰어난 기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이있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네오펑크의 주발전지역인 북미지역의 펑크는 정말이지 '젊음의 펑크'다. 10대 20대들의 끓어넘치는 에너지를 눈치보지 않고 발산하고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그네들의 펑크고 그것이 2000년대 네오펑크의 원동력이다. 펑크는 극히 단순한 코드로부터 수많은 느낌을 뽑아낸다. 아마 슈베르트가 살아있었다면 이건 음악따위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할만큼 지극히 소수의 코드로부터 그들의 감정을 모두 표현해낸다. 테크닉이 얼마나 뛰어난가, 혹은 얼마나 멜로디와 스케일이 복잡한가가 좋은 음악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어려운 작업이다. 그리고 우리 삶은 아무리 복잡한 척해도, 실은 단순하기 그지 없다. 복잡한 척하는 것은 그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거나, 아니면 단순한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펑크는 바로 그것을 꼬집고 들어서는 것이다. 니 인생이 얼마나 엿같은지 솔직히 알바 아니지만, 그것때문에 자기 자신을 속이지는 말라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메세지이다.

Stage Door, really?

My Chemical Romance

4.
         그래서인지 펑크는 사실 그 내용들이 한결같이 다 다르다. 왜냐면 자기네들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단순한 연애 이야기도 있고, 나이들어가는 자신에의 환멸, 권력의 부조리, 사회의 부조리, 엿같은 가정환경, 또라이들의 이야기, 섹스, 그리움, 죽음에의 저항, 젊음의 예찬 등등등등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주제를 다 포함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펑크는 절대 '슬픈 음악'은 될 수 없다. 장엄할 수는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러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절대 슬플 수는 없다. 슬픈 음악이라면 이미 펑크의 세계와는 무관하다. 이것이 사실 현 10대 20대의 특징이기도 한데, 소위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의 X세대(Generation X)로 규정되던 이들과는 구분지어져야 한다. 물론 이들도 펑크음악의 소비자였고, 그래서인지 90년대 펑크는 '분노'가 너무 많이 가미되어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이 10대에 사회에 분노하지만, X세대는 그 수치가 높았다. 90년대에 갱스터 랩(gangster rap)이 시작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락 장르에 있어서 (그리고 펑크에 있어서) 그 분노는 여지없이 드러나보였다. 그렇다, 펑크는 분노의 음악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분노와 좌절의 세대에 의해 영위되었던 음악임을 감안한 것 치고는 놀랍게도, 좌절의 단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쉽게 얘기해서, "인생이 엿같다. 그래서 미치겠고 어찌해야될지 모르겠다."가 그네들의 정서였다면, 네오펑크는 "인생이 엿같다. 근데 내일은 뭐하고 놀까."정도였달까.

         많은 이들이 그 때문인지 펑크를 "현실을 외면하고 랄랄라하는 시끄럽기만 한 음악"이라고 매도해왔다. 하지만 펑크음악이 연주되면 자동적으로 그에 맞춰 반응하는 그들의 몸은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펑크는 현실도피적일 수 있고, 끓어넘치는 분노를 담고 있을 수도 있고,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듣는 이를 눈물 짓게 하지 않는다. 인생이 즐겁다면, 가책받지 말고 즐겨라. 인생이 힘들다면, 내 음악을 듣고 힘내라. 인생이 널 배신한다면, 한번 웃어제끼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 이것이 바로 펑크의 정신이다. 따라서 90년대에 이모펑크(emo punk)가 발전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좀더 감정과 감성에는 충실하지만, 그로 인한 패배감이나 좌절감은 절대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엄하게 맞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모펑크는 기존의 네오펑크보다 감성 그 자체를 중요시하기도 하지만, 간단하지만 그네들의 철학마저 담아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모펑크조차도 슬픈 리듬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Where's Brownsound?

Sum 41

5.
         이제까지 나온 이야기를 모아보면 조금 어이없는 조합이 나온다. 펑크는 저항음악이면서, 동시에 감정에 충실한 음악이고, 즐거운 음악이다. 이 3가지는 사실 서로 이율배반적일 수 있다. 즐거운 것이 어찌 저항정신이 될 수 있으며, 감정에 충실하라면서 왜 슬픈 감정은 외면하는가? 감정에 충실한 것과 저항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마 의아해하는 이들이 꽤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세 요소의 독특한 연관관계로 인해 펑크의 독창성이 도출된다. 그리고 그 연관관계는 위에도 적었던 "즐김으로써 저항하라."로 줄여 쓸 수 있다. 펑크는 몇몇 아티스트만의 장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차고에서, 창고에서, 합주실에서 그들의 feeling에 충실한 음악을 빚어내고 있다. 수많은 신예 펑크 주자들이 그들의 음악을 갈고 닦고 있으며 그네들은 전부 동질적이면서도 하나하나 다르다. "Listen to your heart, cause they can't do anything about it." "네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왜냐면 아무도 그걸 건드릴 순 없거든." 그들은 직접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권력에 대항하고, 부조리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우리네 삶을 즐기는 것, 감정을 분출하는 것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왜냐면 그것이야말로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깨질 수 없는 무엇인가이기에. Green Day의 보컬 Billie Joe Armstrong은 노래 Good Riddanc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It's something unpredictable, but in the end it's right. I hope you had the time of your life." "인생은 예측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엔 제대로 돌아온다고. 잊지 못할 멋진 시간을 보내면 되는거야." [각주:4]

Green Day

Nimrods

  1. The 70's Show 시즌 1 에피소드 22에 등장하는 에릭, 하이드, 페즈의 대화. [본문으로]
  2. 본 포스트는 2007년 초에 처음 작성 되었고, 2007년 11월 10일 수정 보완됨. [본문으로]
  3. 프로토펑크란 사실상 하나의 장르라고 구분 짓기는 애매하고, 말그대로 펑크의 원류에 영향을 끼친 garage rock이라든지 rock n' roll, glam rock등의 일부 아티스트들이 해당됨. [본문으로]
  4. Rough Drafts에 게재된 미러 포스트가 2007년 11월 26일자로 네이버 메인 페이지의 '감성지수 36.5' 코너에 소개되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