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きる (1952, 쿠로사와 아키라)
MuzeWeek/Culture
2008. 1. 3. 10:41
당신은 살아 있습니까?
사실 영화를 보며 내내 신경이 쓰였다고 할까 아니면 관심이 갔다고 할까 주인공 와타나베의 굉장히 말똥말똥한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엄청난 포스를 지닌 ‘내 인생 엄청 처량합니다. 함 도와주십쇼.’식의 그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다. 글쎄,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치 영화를 어느 중간부터 봐도 이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상징적인 눈동자라는 설정에는 결함이 없어 보인다.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아온 인물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마치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다가가려하지 않는 그런 눈동자 말이다. 30년이란 세월을 공관서에서 보낸 이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그런 애처로운 것이었다. 2
아이고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여
도장을 찍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철저히 관료조직 속에 흡수되어 비인간화된 첫째 양상의 와타나베는 자신이 위암으로 곧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저축해둔 5만엔을 ‘메피스토’와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전부 소비해버린다. 이에 대해 직감적으로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에서 나타나는 ‘소비’는 모두 마지막 生에 대한 발악이랄까, 혹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일부러 피부로 느끼기 위한 어떤 것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는 3번째 단계가 아닌 2번째 단계 절망에 머무를 뿐이다. 물론 철저한 절망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로 ‘살아있음’을 느끼려면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라는 단계를 비켜가기란 힘들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런 ‘사회’에 대한 sarcasm적 내용들을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와타나베가 위암선고를 받고 (선고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조용한 길거리를 걷다 갑자기 고개를 들자 주변이 굉장히 시끄럽고 번잡해지는 장면이 있다. 이는 일종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임계점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흔히 이야기하듯이 죽음을 앞둔 이들은 세상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출근길에, 혹은 일상적으로 매일 보아오던 길거리가 갑자기 유난히 번잡하게 보이고 자신과는 반대로 굉장히 활기차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갈림길이 생기는데 여기서 바로 4번째 단계로 뛰어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와타나베와 같이 더욱 많은 신호가 쌓여야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이들이 있다. 혹은 와타나베의 심란한 마음속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금전적 소비로서 자신의 생을 느껴보려던 그의 시도는 피아노 주점에서 ‘인생은 찰나의 것’이라는 곡을 신청함으로서 마무리된다. (주점에 있던 사람들은 이 노래에 마저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서에 있던 말단 여사원을 길거리에서 마주치며 자신은 지니지 못한 그녀의 발랄함과 활동감을 공유해보려는 3번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3단계는 시청일이 ‘지루해서’ 관둔 여사원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장난감 토끼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것을 보여줌으로 인해 다시 좌절에 맞부딪히게 된다. (장난감 토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여러 추측이 가능하지만, 공장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자.)
여하튼 3단계까지가 어떠하였는지는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4단계인데, 이것을 새롭게 변한 와타나베의 모습이 아닌 ‘죽은’ 그로 설정해보았다. 이는 영화의 구조를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다. 갑자기 시청에 다시 나타난 그는 하수구가 어쩌고 하더니 갑자기 사라지고, 다음 장면에는 이미 죽어있다. 그 이후의 모든 내용들은 모두 그의 초상집으로 집약된다. 그 공간은 넓다면 넓겠지만 상객들이 자리를 비집고 앉아서 양 사이드로 서로를 마주보는 구도로 마치 ‘일부러’ 사람들을 꾸겨 넣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특히 상객들이 앉아있는 물리적 대립구도는 실제 와타나베에 대한 평가 혹은 그에 대한 생각에 대한 대립구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흐릿해지기도 하고 뚜렷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이 초상집에서 상객들이 그 이후의 와타나베의 행적을 평가하며 관객들에게 그 뒷내용이 밝혀지는데 그가 2,3단계에서 찾지 못한 뭐랄까 ‘참된’ 생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건 영화의 구조와 그 내용이 오묘하게 엇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종합해보자면 와타나베가 그의 마지막 순간들을 경직된 관료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죽었음을 알게 되지만, 그것은 필름이 다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이고 그 이전 순간순간을 생각해보자면, 한번도 관객들은 와타나베의 행적을 직접 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한 모든 사실과 평가는 초상집 안에서 이루어지고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것을 재구성하여 비로소 우리는 그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사진 속 비교적 젊어보이던 와타나베의 마지막 양상이 드러난다. 따라서 물론 4단계는 와타나베의 죽기 직전의 삶이 되겠지만, 그것은 죽음 이후의 그이기도 한 것이다.
1952년도라면 시대적 배경으로, 아직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시기이고 패전한 일본이 미국의 교두보 역할을 해내며 한창 재건해나가던 초기 시절이다. 쿠로사와 감독은 일본이 근대화 이래로 지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를 영화 전반에 담아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경직된 관료사회와 자본주의적 소비사회 등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고,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와타나베라는 인물의 생에 주목을 한 것이 아닐까. 사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50년대 일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료로서도 생각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부의 초상집의 의미는 더욱 미묘해진다. 막상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 인물로 대표된 당대 사회 전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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