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2007학년도 정시 논술 문제 & 해설

Matrix Ltd. 2007. 11. 26. 10:35

1.
          먼저 세 가지 예화를 보면, 각각에서 생활양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식물들의 생태계를 설명한 글은 일종의 카오스에 가깝다. 전혀 상관없어보이는 개체들의 삶이 거대한 지구 생태계라는 이름 하에 서로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공존하는 형태이며, 흔히 "Mother Nature"혹은 "Gaia"로 불리는 자연 생태계의 모습 그대로에 가장 가까운 형태다. 단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무작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카오스가 완벽히 무작위는 아니듯이, 예화 1의 생태계 역시 완전한 무작위에 가깝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각각의 개체보다 더 넓은 범위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법칙은 보통 더 큰 범위의 생존에 영향을 끼친다. 식물들이 계절에 따라 다르게 생존하는 것은 지역 생태계, 더 나아가서는 지구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의 개체들은 의식적으로는 무작위를 경험하지만, 무의식으로는 배경의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법칙은 의식되지 못할 만큼 지극히 최소한이거나 개체의 삶에 관여하는 정도가 적을 것이다.

           두 번째로 돌고래의 생태계를 설명한 예화는, 집단효과통제를 설명한다. 세 가지 예화 모두 인간의 행태가 아닌 자연에서 그 예를 찾은 것이기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두 번째 예화는 종속도를 기준으로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각 개체들이 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호를 위해 혹은 개체의 차원을 벗어나는 새로운 형태의 agenda를 실행하기 위해 인위적인 집합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슷한 업종의 회사들이 연합하거나, 공단을 건설하여 공동 운영해가는 형태, 또는 EU, UN, 동북아시아 레짐등의 초국가적 협력집단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협력이지만, 실제 공통의 궁극적 목적은 각 개체의 안위와 보호, 발전이다. 따라서 이런 형태로 인식한다면 각 개체 간의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약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반면, 조금 다르게 해석하여 각 개체들이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 자체가 새로운 의미와 agenda, 안보의 필요성을 생성해내고 각 개체들이 그에 의존하게 된다면, 전혀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가장 쉬운 예로는 현대의 국가 단위가 그렇고, 어떤 경제의 단위가 될 수도, 기업의 단위가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집단은 결코 개체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게 되고, 앞의 경우와 유사한 기능을 제공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시스템이 구성된다.

           세 번째 산양의 이동방식을 설명한 예화는, 경쟁효율을 설명한다. 각 산양의 목적은 생존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다른 산양들과 경쟁하게 되고, 결국 그들은 생존을 위해 '이동'이라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냥 적당한 이동이 아닌, 가장 효율적인 이동의 결과가 나온다. 물론 풀을 뜯으며 생존한다는 기존의 목적도 달성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예화를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이 포유류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허겁지겁 풀을 뜯어먹어야 할까? 예화를 다시 보면, 조금 역설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과연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풀을 뜯어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풀좀 뜯어먹겠다고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냅다 달리고 있다면, 그건 과연 효율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산양들이 군집되어 있지 않고, 각각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고 보자. 적어도 몇 평방미터내의 풀을 마음껏 배불리 뜯어먹으며 잘 살고 있었는데, 더이상 뜯어먹을 풀이 없다. 옆 동네에 가봤더니 다른 산양이 이미 다 뜯어먹고 난 이후다. 아무리 헤매봐도 제대로 풀이 나 있는 곳이 없다면, 결국 그 산양은 생존이라는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산양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동'이라는 수단이 필요한 것이고, 그 이동을 이루어내기 위해 경쟁을 매개로 사용한 것이다. 경쟁이란 어떤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이들이 결집되어야 나타나는 행태다. (결집이란 꼭 지역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아도 된다. 기업이나 개인의 경우 동일한 시장 혹은 관심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경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부담스럽고 귀찮은 수단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직선코스를 제공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개가 되는 것이다.

           각 예화를 변화 속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화 3 > 예화 2 > 예화 1의 순서가 될텐데, 정확하게 비교의 대상으로 맞아 떨어지는 성격의 것들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각각의 예화는 인위성이라는 기준으로 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고, 그럴 경우 순서는 예화 2 > 예화 3 > 예화 1이 된다. 그리고 그 인위성은 다시 말해서, meddling, 즉 개입여부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예화 1은 정부, 혹은 상위 집단의 개입이 극히 최소화된 형태이고, 예화 3은 경쟁의 모티브만 심어주는 형태, 예화 2는 직접 개입하여 개체의 삶에 영향을 주는 형태로 볼 수 있다.


2.
           한국과 미국 각 사회 영역의 변화 속도를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정부(government)란 그가 담당하고 있는 공동체, 혹은 국가의 보안과 운영에 기본적인 목적이 놓여있다. 따라서 정부는 항상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변화를 꺼릴 수 밖에 없으며 차이가 있다면 그 거부의 정도와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물론 기본 목적을 범하지 않으면서 발전과 변화의 방향 모두 제대로 이끌어 내는 정부가 훌륭한 형태겠지만, 그렇지 못한 정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기업, 가족, 정부의 단위로 바라보았을 때 제시문 (나)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기업이 가장 변화 속도가 빠르고, 가족이 그 다음이며, 정부가 가장 느리다. 미국의 기업환경은 보통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이야기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배경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만큼 정부의 간섭은 적고, 기업 자체의 자유도가 높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퇴출당하고, 승리하면 모든 것을 가져간다. 물론 로비도 정당한 경쟁의 일환이다. 미국 정부는 그들에 자금을 제공하는 기업에게 각종 혜택을 주지만, 그렇다고 타 기업의 발목을 잡지는 않는다. 모든 변화 속도는 경쟁과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가의 정도로 결정된다. 따라서 미국의 기업환경은 예화 3에 가까운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의 변화 속도는 어떠한가. 60~70년대부터 발목을 잡아온 간섭의 굴레가 하나 둘씩 벗겨져 가고 국가 정부 논리로 자행된 관행들도 줄어들고는 있으나, 아직 그 그림자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사실 한국 경제와 기업의 변화 속도는 각 산업 종류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가장 미국의 형태에 가까운 무한 경쟁 환경에 있는 산업중 대표적인 것은 모바일 산업과 컴퓨터, IT산업이다. 이런 종류의 산업들은 시속 100마일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외의 산업들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은 어떠한가. 미국 가족의 변화 속도를 60마일로 지정했는데, 사실상 가족의 변화 속도는 측정 불가능하다. 물론 미국의 경우 아직까지의 한국 가족보다 해체와 개인화가 더 심화되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은 어떻게 인위적으로 묶어둘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공통의 agenda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단지 혈연으로 이루어진 생활공동체일 뿐, 그것을 각 개체들이 받아들이는 정도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전근대와 근대사회의 경우 가족 혹은 가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편견이 강했지만, 지금은 개인의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앞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미국도 70년대 중산층의 소위 "American Family"의 단란한 이미지는 깨어진지 오래이다. 특히나 정부는 가족에 개입할 명분도, 타당성도 없고, 가정이란 각 개인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생활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될 것이다. 따라서 가족의 변화 행태는 예화 1에서 살펴본 카오스로 회귀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가족이 변화하기 원한다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으며,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미래는 가혹한 것이 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라면 한국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뿌리때문에 가족을 중요시하기에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도, 방법도 모두 서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가족이 국가를 구성함에 있어 중요한 매개체라고 역설한 바 있으나, 수 천년이 지난 지금의 환경에는 적용할 수 없다.

           이제 국가와 정부의 관점에서 변화 속도를 보자면, 위에 미리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정부는 사회 각 요소들 중 가장 변화에 둔감할 수 밖에 없는 집단이다. 국가의 운영과 발전은 모험을 통해 이룩될 수 도 있지만, 안정성을 통해 추구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 자체가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각 사회 요소들이 변화를 추구함에 있어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의 구성원 전체가 정부의 구성원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정부가 직접 비전을 제시, 프로젝트 구성, agenda 설정 등을 적극적으로 해나갈 수는 있지만, 각 개체 모든 이들을 위한 그런 변화를 매번 겪어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예화 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는 적극적일 수 있고, 소극적일 수 있는데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정답은 없었다. 과연 정부가 그 막대기의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가를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변화의 역사이자 속도다. 불필요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능력이 닿는 한 국가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너무 공격적이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흘러가는대로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된다. 바로 그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행, 그것이 정부의 변화 속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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