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 Movie: Hotel Rwanda (2004)

MuzeWeek/Culture 2011. 12. 5. 23:41

= Hotel Rwanda Closed for Genocide =


                 Hotel Rwanda(2004)는 1994년 발발한 르완다 집단학살(Rwandan Genocide)의 생존자인 호텔리어 Paul Rusesabagina가 자신의 연줄과 영향력을 이용해 그의 가족 및 1,000여명이 넘는 이들의 생명을 자신이 근무하는 호텔에 수용해 보호하려 한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결국 관객은 그의 눈을 통해 가장 미시적인 시점에서 르완다 집단학살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반대로 그 앞 뒤 문맥을 제대로 모르는 제3자에게 단순한 집단학살의 충격적인 잔혹성만을 보여주는데 그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은 오랜 기간에 걸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갈등관계, 그리고 아프리카가 겪은 유럽에 의한 식민지배 역사를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간단히 작성한 르완다 집단학살에의 배경설명이다.

                 15세기 르완다 왕국을 성립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고 있던 투치족은 보다 백인종(Caucasian)에 가까운 신체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목격한 유럽인들은 이들이 검은 유럽인(Black European)이기에 이리도 발전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고 우매한 후투족과 트와족을 지배할 자격을 지닌다는 함족 가설(Hamitic theory)을 적용한다. (실제 유전학적 연구결과 투치족이 토착민이 아님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이미 수세기에 걸친 후투족과의 혼혈의 결과 더 이상 구분이 무의미해진 상태이다.) 그렇게 르완다를 식민지배하던 유럽세력들은 별 무리 없이 투치족의 통치권을 인정해왔는데, 독립을 전후로 하여 후투족이 반기를 들자 많은 투치족이 주변 국가로 도망쳐 난민이 된다. 그 투치 난민들이 Rwandan Patriotic Front를 결성해 1990년 르완다를 침공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고, 이는1993년 국제사회의 압력에 의해 아루샤 협정으로 종결되는 듯 하였다. 사후 처리를 위해 United Nations Assistance Mission for Rwanda(UNAMIR)라는 이름으로 평화유지군이 르완다에 파견되었으나, 후투족 정부는 물밑에서 조직적으로 르완다 내부의 투치족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라디오를 통한 공격적 선전, 출신성분을 적은 ID카드의 의무화, 민병대 결성 및 훈련 등을 지원한다. 1994년 후투족 대통령 Juvénal Habyarimana가 탑승한 비행기가 격추되자, 대통령 경호부대와 민병대들의 주도하에 투치족과 온정적인 후투족에의 학살이 시작됐고 100여일 동안 50만~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UN군은 애매한 교전수칙에 발이 묶여 학살을 저지할 수 없었으며, RPF는 다시 르완다 국경을 넘어 후투족 정부를 전복시키고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영화의 큰 주제는 “르완다 집단학살”이지만, 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는 여럿이 있다. 첫째는 집단광기(mob madness) 혹은 증오(hate)로, 이젠 구분의 의미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집단에 대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Hutu Power!라는 문구와 라디오 선동, 티셔츠 등의 상징 조작(symbol manipulation)을 보고 있자면 나치 독일의 그것이 떠오른다. 둘째는 서구적 문화와 품격, 스타일(style)을 즐기다 정작 극한의 상황에서 “유럽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아프리카인의 모습에서, 서구 식민지배 역사가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어떻게 뒤틀어놓고, 버렸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셋째로 UN과 국제사회의 대응문제인데, 이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서구의 국가들은 그 실상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UNAMIR의 대표는 Romeo Dallaire 사령관으로부터 조직적 학살의 가능성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또 벨기에는 학살이 시작되자 UNAMIR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자국군을 철수시켰으며, 미국 역시 르완다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을 거북해했다.

                 단지 유럽에서 가까웠기에, 그리고 피부색이 달랐기에 수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은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유럽으로부터의 독립 이후에도 냉전의 양극 구도 속에 잊혀져 정치적 불안정과 살육, 전염병, 빈곤의 땅이 되었다. 코소보 사태와 르완다 건이 다른 점이라면, 바로 전자의 무대는 “유럽”이었다는 것이다. 감히 유럽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지만, 아프리카에선 그럴 수도 있다. 유럽이 1930~40년대 전체주의와 세계대전의 역사를 지나 유럽연합으로의 진행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20세기 후반, 아프리카는 그 증오와 혼돈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그 증오가 홀로코스트에 비해 아주 비합리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후투족이 수세기에 걸친 폭정과 억압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려면 오로지 투치족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없애는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할 때, 그들을 지배하던 서구인들은 괜히 휘말려 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참혹한 결과를 막을 수 없다면 대체 UN은 나치즘과 파시즘을 막지 못한 LN과 그 무엇이 다른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긍정적이나, 그를 위해 80만의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르완다 내부 폭정의 역사와 정치적 불안정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집단학살의 사례를 더 찾고 싶으면,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르완다의 접경국가인 부룬디(Burundi)에서 1972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친 집단학살이 있었다. 부룬디는 르완다와 함께 1962년 신생 독립한 국가인데, 이는 두 국가가 이전에 Ruanda-Urundi라는 명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부룬디 역시 후투족과투치족으로 구성된 국가이지만, 독립 이후 후투족이 정권을 장악한 르완다와는 다르게 투치족이 정치적, 군사적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1972년 3월, 헌병대(gendarmerie)의 후투족 일원 몇몇이 주도하여 반란이 일었고, 이들은 Rumonge와 Nyanza-Lac의 두 마을을 점령하고 “Martyazo 공화국”의 설립을 공표하였다고 한다.[각주:1] 목격자들에 의하면 후투족 반란군은 닥치는 대로 투치족을 살해하였으며, 반란에 동조하지 않는 후투족 역시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 후투족 반란 과정에서800~1200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투치족 대통령인 Michel Micombero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후투족에 대한 보복적, 계획적 집단학살을 진행하였다.[각주:2]  이 집단학살의 초기 단계에서 계획성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교육받은 엘리트층에 속하거나 군사적 교육을 받은 후투족에 대한 제거 목표 명단도 존재했다고 한다. 그 명단의 목표를 모두 제거한 후 투치족 명령 하의 군대는 더 넓은 범위로 눈을 돌렸는데, 투치족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공식 사망자는 15,000명이지만 후투족 측은 300,000명에 가깝게 학살 당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연구 결과들은 최대 210,000명이 죽었을 것이라는 수치를 내놓았다.[각주:3]

                 르완다 집단학살의 수치와 비교해보면 1/4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미 수십만 명이 자국의 군대로부터 학살을 당했기에 그 잔인성의 정도를 저울질할 수는 없다. 수적으로는 르완다나 부룬디 모두에서 투치족이 후투족에 비해 훨씬 적은 인구를 가지지만, 어느 쪽이 실제 정권을 쥐는가에 따라 상황은 반전된다. 1994년의 르완다만 놓고 보자면 투치족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로 비춰질지 모르나, 부룬디의 케이스나 우간다, 자이르(현재의 콩고 공화국) 등에 소재한 난민 캠프의 후투/투치 갈등관계, 그리고 시간을 길게 두고 본다면 이 두 집단은 이미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된다. (부룬디의 2차 집단학살 당시인 1993년에는 다시 25,000명 가량의 투치족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혹자는 투치족들은 부룬디로, 후투족은 르완다로 가서 각자만의 국가를 가지면 되지 않는가 질문할 수도 있겠다. 마치 파키스탄과 인도의 케이스처럼 말이다. 하지만 각각은 자신이 속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살아온 그 땅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기 때문에 난민이 되더라도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것 같다. 실제로 1990년 RPF가 우간다(Uganda) 국경을 넘어 르완다 내전을 시작한 이유 중에는, RPF의 사령관이었던 Fred Rwigema가 우간다 국방부 차관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사회적으로 제노포비아가 번지던 시기라 그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르완다 난민을 포함한 非우간다인들이 우간다에 정착할 수 없는 법안까지 통과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각주:4] 물론 RPF가 순수하게 르완다 출신의 투치족으로만 구성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 사정이 정확히 어떤지 알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집단학살의 다른 사례로는, 가장 최근이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다르푸르 분쟁(Darfur Conflict), 혹은 사태를 들 수 있겠다. 다르푸르 분쟁이란 수단의 다르푸르 지역 부근에서 진행중인 게릴라성 분쟁 혹은 내전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2003년 2월, 다르푸르에서 Sudan Liberation Army (SLA)와 Justice and Equality Movement (JEM)가 무장 봉기하며, 수단 정부가 아랍계의 입장만 고려해서 아프리카 흑인계에 대한 억압과 인종학살을 돕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분쟁의 한쪽은수단군 및 경찰, 그리고 Janjaweed라는 대부분이 아랍계 유목민들인 Abbala족으로 이루어진 민병대로, 그리고 다른 한쪽은 위에 언급한 반군 집단인 SLA와 JEM인데, 이들은 대부분 비아랍 이슬람계인 Fur, Zaghawa, Masalit족 등으로 구성된다. 수단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Janjaweed에 대한 지원을 부인하지만, 그들에 대한 재정 지원, 무기 보급, 민간인 집단학살에 동참 사실을 추궁하는 여론이 일었고, 민병대 설립 자체도 정부차원에서 진행되었다는 분석이 있다.[각주:5]

                 수단정부와 반군 중 가장 큰 단체인 JEM은 2010년 2월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차후 평화를 위한 잠정적 동의를 하였다. 이 휴전을 통해 JEM은 남수단(South Sudan)과 유사한 자치권을 얻을 가능성도 열린 셈[각주:6]이었으나, 수단 정부군이 2월 협정을 위반하고 한 마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나왔고, JEM은 결국 협상에 불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참사자 수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수단 정부는 공식적으로 19,500명의 민간인의 죽음이 있었다고 집계[각주:7]했으나,국제정의연맹(Coalition for International Justice)등의 단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2005년 기준 400,000명 이상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각주:8]  2010년 1월에 벨기에 소재의 The Centre for Research on the Epidemiology of Disasters는 95%의 신뢰도로 다르푸르에서 178,258명 ~ 461,520명 (평균 298,271명)이 죽었고,이중 80%는 질병에 의한 사망이었다고 발표했다.

                 여러 외신들의 보도를 종합해보자면, 이 Janjaweed라는 집단은 아랍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그들을 “마피아와 Ku Klux Klan을 추악하게 섞어놓은 형태”라고 비난하면서 “아랍인이야 말로 최고의 인종이며 비아랍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믿는, 그리고 수단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정치깡패집단”이라 평하였다.[각주:9] 독립 이후 거의 아랍계로 정부가 구성되어왔기 때문에 다르푸르 지역을 “아랍화”하기 위한 정부 주도의 학살이라는 평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엔 가축을 위한 물을 찾아 다르푸르 지역으로 내려온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아프리카 흑인계 인구를 줄이기 위한 정치적 아젠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대다수를 차지했다지만, 결국 그들을 난민캠프라는 극한 상황으로 밀어 넣은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르완다 때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국제사회의 관심도와 평화에 대한 촉구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2005~2006년 당시 처참한 난민캠프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구호와 관심이 반짝한 감도 있지만, 국가 내부의 문제니 손 놓고 있겠다는 식의 국제적 인식은 이제 점차 변해가고 있다고 믿는다.

  1. René Lemarchand, Burundi: Ethnic Conflict and Genocide (New York: Woodrow Wilson Center 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 89. [본문으로]
  2. Lemarchand (1996), p. 97 [본문으로]
  3. Thomas Ndikumana, Inter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for Burundi: Final Report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2002), Paragraph 85. [본문으로]
  4. Linda Melvern, Conspiracy to Murder: The Rwandan Genocide (New York: Verso, 2004), pp. 13-14 [본문으로]
  5. Colum Lynch, "Rights Group Says Sudan's Government Aided Militias", (Washington Post, July 20, 2004), A12 [본문으로]
  6. "Will peace return to Darfur?", http://news.bbc.co.uk/2/hi/africa/8533097.stm, (BBC News, February 23, 2010). [본문으로]
  7. Gamal Nkrumah, "Al-Ahram Weekly | Region | Old dogs, new tricks", (Weekly.ahram.org.eg, December 6, 2006). [본문으로]
  8. Marc Lacey, "Tallying Darfur Terror: Guesswork with a Cause", (The New York Times, May 11, 2005). [본문으로]
  9. Rebecca Leung, "Witnessing Genocide in Sudan - 60 Minutes", (CBS News, August 28, 200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