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 Movie: Romero (1989)

MuzeWeek/Culture 2011.12.07 03:44

= San Romero =


                Romero (1989)는 엘 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임명 받은 후 1980년 암살당한 Óscar Romero의 생애 마지막 몇 년을 그리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냉전시기 제3세계 중남미 국가 중 하나인 엘 살바도르의 참혹했던 정치적 현실과, 1950~60년대 태동한 남미의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모습을 목격하며 정치적 양심의 목소리로서 종교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 혹은 부정한 권력에 대한 대항기제가 될 수 있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다. 앞서 Romero가 1942년 4월 4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카톨릭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에 한창 휘말려 있던 Fascist Italy라는 시대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이 어떻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타협했는지 목격했을 것이며, 엘 살바도르로의 귀국 후 어떻게 정권의 부정함에 대해 침묵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최대한 세속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소위 ‘온건’한 입장을 견지해오다, 해방신학을 실천해왔던 예수회 신부이자 그의 절친했던 친구 Rutilio Grande가 암살당하자 정부에 대한 입장을 바꾸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와 유사하게, 엘 살바도르는 현재까지도 카톨릭 신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50%를 넘고 여타 기독교 종파까지 합치면 그 비율이 압도적일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막강한 곳이다. 따라서 빈부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다수의 국민이 신자인 곳에서 주교나 대주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넓은 정치, 사회, 경제적 스펙트럼을 포괄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비민주적인 군사독재 정부와 해방신학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전반적 사회상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냉전시절, 종속이론에 얽매여 자급자족을 내세우며 빗장을 걸어 잠그고, 수도 없는 쿠데타와 마약 거래, 게릴라 민병대 등으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속에 내몰려야 했던 남미의 현실은 참혹할 수 밖에 없었다. Rutilio Grande가 몸 담았고, Romero 역시 중용을 지키려 노력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시대적 배경에 의해 유사한 목소리를 내게 된 해방신학이란, 예수의 가르침을 부당한 사회, 경제, 정치적 현실에서의 해방(liberation)으로 해석하는 운동이다. 물론 해방신학을 Marxism과 공산주의에 물든 변종이라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솔직히 그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질적 정치참여권을 제한하고, 자국민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대한 내부고발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의를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불의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영화에 그려진 참혹한 남미의 정치적 현실과, 마치 John Locke의 논리와도 비슷하게 신에 의한 명령으로서의 자유에의 갈망과 부당한 정치권력에의 저항권을 설파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감옥에 갇혀 “우리도 인간이다! (We are human beings!)”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 타협할 수 없는 자연법적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창을 읽을 수 있었다. 세속과 분리된 허례허식의 소꿉장난 속에 함몰된 종교성은 그 자체로 이미 역설이다. 물론, 종교의 정치참여는 그 위험성도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유럽의 중세 이후 종교가 세속의 정치와 분리된 것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막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종교권력의 영향력이 반드시 올바르게 작용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의 현실 정치 개입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Romero의 외침이 의미 있게 다가옴은 그가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지닌 종교의 대주교였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 인권이 탄압받는 그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 그 정치현상에 속한 한 명의 주체로서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Romero의 이야기를 쭉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였던 인물은 故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고, 2009년 2월 16일자로 선종한 그는,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치 상황에 있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강압적 독재정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연루돼 구금됐을 때는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기도 했고, 그 앞에서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또한, 정교분리와 자유와 인권 등의 문제를 놓고 박정희와 갑론을박하다가 논쟁 끝에 박정희를 설득시켜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고,[각주:1]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1971년에 대한민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성탄 미사에서 그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각주:2]

                그는 1980년대의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 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는 말을 남겼다.[각주:3] 또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각주:4]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에도 미사에서 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6월 항쟁 때는 명동 대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각주:5]

                김수환 추기경은 카톨릭이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의 정치적 발언들은 많은 비판에 봉착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왔다. 카톨릭이 종교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남미의 엘 살바도르와 비교해보면, 한국에서의 위상은 분명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종교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더 의미심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사실은, 그가 카톨릭의 교리를 내세워 세속의 정치에 간섭하려 들었다기보다는 타협할 수 없는 인권과 정의, 그리고 그에 기반해 파생되는 정치적 자유를 주창한 한 명의 정치주체였음이 아닐까.

                또 하나의 사례를 미국에서 찾아본다면, Martin Luther King Junior 목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Malcolm X와 함께 1950~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대표주자였고 그 활동으로 말미암아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지만, 1968년 4월 4일 Memphis, Tennessee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활동은 1950년대부터 이어지지만 가장 유명한 일화는 바로 우리에게 워싱턴 대행진이라 알려진 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 (1963년 08월 28일)에 참여하여 링컨 기념관 앞에서 “I Have A Dream” 연설을 한 사실일 것이다. 수사학적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King의 연설은, 그가 침례교 목사인 탓인지 설교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이 연설은 성경과 미국 독립선언문,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문, 미합중국 헌법 등 상징성 있는 텍스트에 대한 인용을 하여 인종간의 평등, 공존,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약 20만명의 관중들에게 전달되었다.[각주:6]

                그는 동일한 흑인 인권 문제를 놓고도 급진주의적인 Malcolm X와 다르게 비폭력 저항을 주장하였다. (참고로 Malcolm X는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폭력적인 충돌보다는 비폭력적 시민 불복종을 통해 인권 탄압에 저항하려 하였고, 흑인에 대한 역사적 폭력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5년부터 그는 베트남 전에 있어 미국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1967년 4월 4일 (정확히 그의 암살 1년 전) 뉴욕 시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Beyond Vietnam”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참전을 인도주의적,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연설을 한 바 있다.[각주:7]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여가자 존슨 미 대통령, 노동조합장, 유명 편집장들을 비롯한 많은 백인 지지자들이 당시에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각주: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 이후 그는 지금까지 민권 운동의 아이콘이 되어 있다. 특히 범적 평화 공존의 메시지를 담은 I Have A Dream 연설은 비단 흑인 뿐 아닌, 미국의 다른 모든 형태의 인권 증진의 가능성을 촉진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킹 목사가 암살된 그 해, 그의 미망인 Coretta Scott King은 그의 유산과 비폭력 갈등 해소, 관용에 대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The King Center를 건설하였고, 킹 목사의 아들 Dexter King이 그 소장으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한 활동을 지속해나가고 있다.[각주:9]

                종교 지도자들의 현실 정치 참여는 효과적일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한가지 확실한 점은, 그들이 지닌 카리스마로 인해 사람들에게 큰 메시지를 각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의에의 타협이라든지 신에게서 부여 받은 권리로서의 정치적 자유 등이 종교라는 요소와 만나면, 무시할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부정적으로 보면 선동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이렇게 현실 정치에 있어 막강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역설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맹신하는 신자들은 현대 사회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현대에는 수도 없는 정보의 원천이 존재하고, 따라서 얼마든지 대체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들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정신적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치적 신념에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가 세속 정치와 무조건 구분되어야 한다고 단언하기 전에, 그것이 정치적 양심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면 우린 그에 한번쯤 귀 기울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1. 하윤해, “[선종 김수환 추기경 추모] MB,천주교병원으로 맺은 인연 각별”, 국민일보 2009.02.17 일자 [본문으로]
  2. 양효경, “김 추기경 어록‥시대 비춘 양심의 소리”, MBC 2009.02.18 일자 [본문으로]
  3. 김지연, “<김수환 추기경의 웃음과 눈물>(종합)”, 연합뉴스 2009.02.16 일자 [본문으로]
  4. 권복기, “12·12뒤 전두환 면전서 “서부활극 같다” 일침”, 한겨레 2009.02.17 일자 [본문으로]
  5. 김한수, “암흑의 시절 '민주화' 중심… 국민들은 그의 입을 쳐다봤다”, 조선일보 2009.02.17 일자 [본문으로]
  6. Hansen, D. D, The Dream: Martin Luther King, Jr., and the Speech that Inspired a Nation (New York: Harper Collins, 2003), p. 177 [본문으로]
  7. Krenn, Michael L, The African American Voice in U.S. Foreign Policy Since World War II (Routledge, 1999), p. 29 [본문으로]
  8. David J. Garrow, Bearing the Cross (Harper Perennial, 1999), pp. 440, 445 [본문으로]
  9. Copeland, Larry "Future of Atlanta's King Center in limbo", USA Today, 2006.02.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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