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06) : It is not ours to decide.

MuzeWeek/Culture 2007. 11. 11. 14:11

Dead Man Walking!

Dead Man Walking!

계속 미루어만 오다가 오늘[각주:1]에서야 갑자기 다 읽게 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렇다. 소위 말하는 '우행시'를 마저 다 읽었다. 작년인가 영화가 제작되어 개봉되었을 때도 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보지 않았다. [각주:2] 같은 사형제도를 다루는 서사지만 이전에 보았던 [데이비드 게일](The Life of David Gale)을 볼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다 읽고 든 생각은, 혹시 이것이 실화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는데 작가의 에필로그나 기타 다른 정보들을 종합해볼 때 실화는 아닌듯 하다. 그럼에도 난 사라 E. 워스가 이야기했듯이 허구에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각주:3] 나 말고도 우행시에 대해 이야기 할 사람은 많을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이야기해보겠다.

수년 전, 입시 준비하며 구술 논제로 소위 "사형제도 존폐논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었지만 그때는 물론 몰랐고 얼마 전까지도 몰랐던 사실은, 바로 내가 그런 문제를 생각하기에 너무 어렸다는 사실이다. 아니 물론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나이의 특히 수능준비 이외에는 아무런 인생경험도 없는 한국 학생들이 논하기엔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은 주제였다는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나름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척하며 사형제도의 기능적 실익이 어쩌고 생명의 존엄성이 어쩌고 하던 생각을 하면,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난 아직도 어리다. 사형제도에 대한 올바른 의견이라는 것을 내놓을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누군들 그렇겠는가. 세상 누군들 사형제도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놓았다면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도 짧게나마 내 의견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생명의 존엄성 운운하고 싶지도 않다. 솔직히 수십년 내에만 셀 수 없는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그보다 더 많은 생명이 시작한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소위 시민들의 권리를 양도받았다는 정부가 몇명쯤 저 세상 보낸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따라서 난 날라리일지언정 크리스트교인이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죄질을 따지는 것도, 혹은 범죄억제효과 등도, 또는 상반된 주장을 각각 뒷받침해주는 무수한 통계자료들도 들먹이고 싶지 않다. 왜냐면 그 어떠한 것도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생명은 존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할 자격은 인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신을 의심할 필요도 없고, 어디 있느냐고 울부짖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추악함을 욕할 필요도 없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든, 어떤 생각을 하든 좋지만, 적어도 어떤 생명을 박탈할것인지 결정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한번 생명을 얻은 개체는 반드시 그것을 잃게 되어있다. 생명의 정의는 죽음에의 두려움과 생존에의 의지 등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생명을 가진 인간들이, 다른 생명의 소멸시기를 감히 정해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생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수억의 인류 중 하나의 생명이란 우주 시공간 하에 손톱에 낀 때만큼도 상관없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생명을 영위하는 주체들로써, 다른 생명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오만한 것이고, 그 생명의 삶이 우리들의 시스템과 사회가 유도한 것이라면 더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It is not ours to decide.

다른 이들은 우행시를 읽으며 혹은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혹은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어디서 울었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내가 흘린 눈물은 사형집행에 관한 것도 아니며, 범죄의 희생양과 망가진 삶에 관한 것도 아니다.

"추운 밤, 애국가를 부르면서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차가운 팝콘처럼 떠 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은수는 노래가 끝나자 웃으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형, 우리 나라 좋은 나라지,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애 ..."[각주:4]

난 웬만해선 울지 않는다. 그렇게 감동적이라는 영화를 보고, 시를 읽고, 소설을 봐도 콧등이 시큰해지긴 해도 울지 않는다. 나 역시 주인공 문유정과 닮아서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저 구절만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치솟아 참을 수가 없다. 부모의 업을 지니고 살면서, 바닥도 보이지 않는 나락에 빠져 빌어먹을 삶을 헤쳐나가는 은수 윤수 형제가 한다는 것이 애국가를 부르고, 부르면서 훌륭한 사람이 된거 같은 느낌을 받는 것.. 난 버지니아텍 참사사건을 이야기하며 "싸이코 한놈 때문에 한국 전체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정말이지 난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 전체가 사죄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사죄해야 한다. 세상 어딘들 행복한 사람들만 살겠냐만은, 난 너무나도 죄책감이 들었다. 사회와 시스템을 대신해 내가 한없이 미안해졌고, 그게 그렇게도 슬플 수가 없었다. 난 소위 말하는 진보적 성향도 아니고, 오히려 정치적 성향은 보수에 가깝지만 정말이지 이건 아니다. 이 사회의 부조리 하나 하나에 내가 죄인인양 가슴이 죄여왔고,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답답해 한다고 뭐 해답이 나오겠느냐만은, 세상을 대신해 내가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농담반 철학반으로 나온 이야기처럼, 창조주의 마지막 메세지는 이렇지 않을까.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각주:5]

...그리고 전 이 세상에 대해 당신들께 죄송합니다.
칼을 쥐어주고 그 칼을 빼앗아 찔러죽인 이 세상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1. 본 포스트는 2007년 4월에 작성됨. [본문으로]
  2. 본 포스트를 작성한 직후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관람하였음. [본문으로]
  3. [Matrix & Philosophy](2002, Carus Publishing Company) 116p. [본문으로]
  4.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2005, 도서출판 푸른숲) 107p. 블루노트 08에서. [본문으로]
  5. "We apologise for the inconvenienc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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