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움 : Quest for Humanity.

MuzeWeek/Culture 2008. 4. 1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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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시먼즈 지음 | 베가북스 펴냄
아킬레스여, 신들의 산 올림포스를 공습하라! 화성에 우뚝 솟은 올림포스. 이 붉은 혹성에서는 최고신인 제우스와 불멸의 신들이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투를 관찰하고 때로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미 9년째로 접어든 전쟁을 지휘하고 있다. 21세기 일리아드 학자로 살았던 토머스 호켄베리. 신들은 죽음에서 그를 데려와 이 트로이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고 자신들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긴다. 또한, 그를 관장하는 뮤즈는 아프

꽤 시간이 지난 이야기지만, 지인의 추천을 통해 Dan SimmonsIlium이라는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별 생각없이 한글 번역본을 샀는데 뭔 놈의 책이 1000 페이지에 육박하더라. 그나마도 Ilium / Olympos 연대기의 첫 파트에 해당할 뿐인데도 말이다. (일리움은 2003년, 올림포스는 2005년에 각각 발간되었지만 후자는 아직 번역본으로는 출시되지 않았고, 아마도 2008년 가을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글은 일리움 전반에 대한 리뷰가 될테니 스포일러가 어쩌니 할 생각은 하지 말자.

일리움의 서사적 구조는 영화 밴티지 포인트(2008), 혹은 미국 TV Series Heroes의 그것과 유사하다. 출발은 각 개인의 시각에 놓여있고, 중반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전혀 별개의 스토리로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다 하나 둘씩 공통분모를 등장시키고, 독자는 말그대로 관전자의 입장에서 게임 전체의 퍼즐을 맞춰가는 것이다. 크게 3가지 물줄기로 시작한 스토리는 후반부에 들어 하나로 모이게 되고, 각기 다른 배경을 3가지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스템은 갑자기 동일한 배경을 3가지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변형된다. (정확히 말하면 고전 인류쪽 스토리 라인이 합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리움은 끝을 맺지만, 올림포스에 가서 겹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그리고 베이스는 SF지만 상당한 문학적 차용이 등장하기 때문에 각각의 차용된 문학작품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를 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일리움은 '배경설명'이 서사의 진행보다 2배쯤 더 되는 양을 자랑한다. 한참 신나게 배경설명을 한 후, 사건 진행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다음으로 넘어가버린다. (실제로 각 Chapter의 제목을 전부 해당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의 이름으로 한 것은 일리움이 얼마나 환경설정에 매달린 작품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SF물의 특징상 배경 및 세계관 설명이 필수적인 것인데다 그 많은 문학가들을 차용하려면 각각의 문학적 배경 역시 설명을 해줘야하니 (일리움 한 권 읽자고 Marcel Prous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읽고 돌아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다만 모든 것을 속성으로 진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현 세대의 독자들에게 (그것도 SF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기에는 마이너스 요인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잠시 부연 설명하자면, ilium이란 ilion (Ίλιον)이라는 그리스어를 라틴화한 단어다. 이는 바로 트로이를 지칭하는 고대어이고, 이 소설이 기본적으로 모티프로 삼고 있는 호머일리아드 역시 이러한 어원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수년 전, 영화 Troy가 개봉한 직후 원작 소설이라고 낚여서 샀던 [트로이]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원제가 The Iliad : The Story of Achilles(일리아드 : 아킬리스의 이야기)라는 일종의 일리아드의 영문번역판 그 자체라고 보면 된다. (...뻔뻔스럽게 작가에 HomerosW.H.D.Rouse 공저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영화 이름 팔아서 한번 매출좀 올려볼 생각으로 한국에서는 그렇게 제목을 붙였던 것일까?) 물론 다른 일리아드 번역판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읽기 편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원작 소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 자세한 이유는 후에 영화 Troy를 다룰 때 설명하기로 하고 이 이야기를 왜 꺼냈냐면, 어찌되었든 [트로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W.H.D.Rouse의 일리아드 해석본과, 영화 Troy (2004), 그리고 소설 일리움은 사실 모두 동일한 타이틀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리움은 일종의 일리아드 re-imagined 버젼이라고 보면 되겠다. (요즘 나오는 Battlestar Galactica가 예전 1970년대 오리지날 시리즈의 re-imagined 버젼이듯이.) 그리고 그 '상상'은 그 누구라도 꿈꿀 법한 판타지에서 출발한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시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을까?" 따라서 스콜릭[각주:1] 토마스 호켄베리의 모험은 모든 역사가들과 문학가, 혹은 전반적인 학자들의 궁극적인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캐릭터는 학자이자 교수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가장 평범하고,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 고개를 들이미는 또 하나의 먼치킨적 영웅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보잘 것 없는 평범한 한 지성이 전설의 미인인 트로이의 헬렌과 사랑을 나누고, 자신이 평생을 연구해온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활약을 하며, 영웅들을 단합하여 신들에 대항한다는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스토리란,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가!

이러한 상상의 사례를 또 하나 들자면, 아킬레스헥토르의 연합이 있겠다. 전쟁사, 혹은 외교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만약 이들이 함께 했다면 세상은 어찌 변했을까?" 그 대상은 개인일 수도 있고, 단체, 사상가 모임, 혹은 국가일 수도 있겠다. 일리아드를 접하는 이들이 가장 궁금해 할 법한 연합이라면, 단연 아킬레스와 헥토르 이 두 인물이 아니겠는가. 애시당초에 헥토르는 아킬레스-킹왕짱-서사시에서 antagonist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기에 둘의 연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 트로이 전쟁 서사의 모든 구조를 무너트리는 것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율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사실 이 구도는 굉장히 헐리우드 냄새가 풍기는 Justice League[각주:2]스러운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댄 시먼즈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를 들먹여도, 그가 전형적인 미국 작가라는 사실은 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일리움의 경우엔, 대항하는 대상이 단순한 '악'이라기보다 자신의 운명, 혹은 역사 그 자체가 되기에 숭고함마저 더해진다. 그리고 이 구도에서 숭고함과 전율을 느끼는 것은 필시, 역사의 어느 시점 이후 인류의 최대 과제는 생존과 도전이 되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스콜릭 쪽 스토리 라인이 '판타지'로 규정된다면, 지구의 고전 인류들과 목성의 모라벡 스토리 라인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둘을 묶는 이유는 그들이 일리움의 내용에서는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지만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아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나는 road trip[각주:3]이다. 특히 모라벡 라인을 '빙자'해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대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한 나름 괜찮은 스토리텔링이 아니었나 싶다. 독자의 눈에는 단순히 로봇에 불과할 뿐인 모라벡[각주:4]들이 인류의 유산인 문학을 연구하고 그 어떠한 인간보다 더 깊은 감정적 경험을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인공 모라벡 2명의 토론 주제이기도 한, 인생에의 해답이 있다.

번역판 커버

고전 인류쪽 스토리 역시 유사하다. 고전 인류는 로봇과 발전된 기술에 안주하며 매일같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즐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유토피아가 아닌가! 모든 이들이 생존의 위협 없이 행복하게, 함께 살아가는 것. 하지만 그 속에는 어떠한 인문학의 유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르며, 어떠한 문학적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지나간 역사가 없기에 나아갈 곳도 없는 셈이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 월등한 기술이 가져다준 지상의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시공간의 레일 위에 멈춰서 그 밖의 모든 존재에게 민폐를 끼치는 어떤 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세계의 주민들인 고전 인류[각주:5]에 속하는 인물들이 일련의 여정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스토리는, 현시대의 인류에 대한 경고임이 분명하다. (물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하고 학습하는 능력을 잃지 않는 인류 근본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의 진보를 포기했을 때, 진정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일리움에서 또 특징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 신에 대한 묘사이다. 물론 고대서부터 그려져왔던 신적 존재들 중 가장 '인간적' 냄새를 풍기는 것 역시 그리스 신들이긴 하지만, 그 두루뭉실한 이미지를 SF의 힘을 빌어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빚어낸 것은 확실히 놀라운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나노 테크놀로지와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적인 능력들을 발휘하는 이 캐릭터들은 트로이 전쟁을 일종의 '스포츠'로 즐기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을 물질화 할 수 있다면, 일리움에 묘사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또한 Matrix 시리즈에 등장한 아키텍트를 연상시키는 프로스페로(Prospero)[각주:6]라는 캐릭터도 일종의 신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전형적인 deus ex machina의 역할을 하니 말이다. 아무튼 댄 시먼즈는 이렇게 과학의 힘(?)을 빌어 신을 물질화하는데 성공했고 그들에 대한 인류의 도전을 허용할 수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 도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비록 그리스 신화가 휴머니즘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시기에 부활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억압적인 신에 대항하는 것은 Humanity 그 자체에 대한 여정이 아닌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그리고 실제로 그 결말이 어떻게 나든,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일리움자유로운 상상과 인문학적 고찰이 만나 이루어진 새로운 차원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받아들이기 껄끄러울 수도 있고 애시당초에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창의적인 그 발상 하나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p.s : 일리움 번역본 900페이지 되기 조금 전 쯤으로 기억하는데, Centurion에 주석을 영국제  센츄리온 탱크 어쩌고 하며 달아놓은 것을 보니 황당하더라. (차라리 Battlestar Galactica의 전투형 사일런인 센츄리온에서 차용했다고 그러지?) 물론 전투용 모라벡이라는 점에서 탱크에서 연상했다고 봐도 상관은 없지만, 실제로 Centurion의 어원을 몰랐거나 트로이 전쟁 당시 센츄리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작성한 주석이라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센츄리온은 물론 로마 시대의 백병장을 일컫는 말이지만, 댄 시먼즈는 '외부의 제국이 파견한 전투부대'라는 의미를 노린 것 같다. 그는 일리움 후반에 등장하는 전투 모라벡들에게 로마 제국의 군대의 이미지를 입힌 것이다. ...어디서 탱크 같은 소리를;;

  1. 그리스 신들이 DNA공학을 사용해 되살린 학자들. 각 인물들의 시대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일리아드를 연구하던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본문으로]
  2. 저스티스 리그. 즉, 한 명 이상의 슈퍼히어로가 더 크고 강한 악을 대항해 연합한다는 설정. 헐리우드는 솔로 플레이 킹왕짱 스토리도 좋아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연합'이라는 단어도 좋아한다. 그게 합중국이라는 국가구조의 특이성이나 2번에 걸친 세계 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경험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본문으로]
  3. 굳이 여기서 내가 road trip이란 표현을 쓴 것은, 서사적 구조가 로드무비의 그것과 유사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리움에서 다루어지는 고전 인류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기보단 하급 중간 보스를 때려잡은 격이지만 어찌되었든 그것도 여정이니까. [본문으로]
  4. 소설에도 직접적인 설명이 등장하지만 부연하자면, 이 명칭은 Hans Moravec에서 차용한 것이다. 한스 모라벡은 로보틱스 학자로써, 미래의 로봇은 인간의 감정과 행태 그리고 모든 인문학적 유산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5. 이들은 소설 안에서 H.G.WellsThe Time Machine에 등장하는 빛의 종족 엘로이라고 비꼬아지기도 한다. 타임머신 소설이나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하이퍼링크를 타고 넘어가 대충 살펴보도록 하자. [본문으로]
  6. Prospero는 원래 셰익스피어의 The Tempest의 주인공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CalibanAriel 역시 The Tempest의 등장인물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