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rs (2002), revisited.

MuzeWeek/Culture 2007. 11. 21. 23:41

The Hours (2002)


내가 지금 하려는 작업은 사실 무모함과 무지의 산물일 수 있다.
[The Hours]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Mrs. Dalloway]에 대한 오마쥬이고,
[Mrs. Dalloway]를 읽지 않은 본인은 절대로 완벽한 평을 작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3년 개념없는 나이에 저질러버렸으니, 어찌하였든 수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도 [Mrs. Dalloway]를 읽어보지 못한 관계로 힘든 작업이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다룰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이라도 교정해보기로 한다.


훗날, 언젠가 내 삶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읽을 기회가 있다면, 다시 수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굉장히 후회 중이다. 내가 미쳤지. 이걸 왜 또 건드려서 =ㅅ=;;
얼마 전에 네이버 메인에 버지니아 울프와 바네사 벨에 대한 포스트가 뜬 것을 눌러본게 잘못이다. [각주:1]
혹시 후에 내가 또 [The Hours]를 갖고 삽질하겠다고 하면, 제발 좀 말려주기 바란다.

평은 아마 3파트로 나누어 작성될텐데
1,2번째는 2003년 당시 영화 관람 직후 작성한 내용을 수정한 것이고,
3번째는 당시 내가 놓치고 넘어갔던 부분이라든가,
아니면 인생사의 녹을 먹어 다시 깨닫게 된 부분이라든가가 포함되어 있다.

스크롤의 압박도 장난 아닐 것이고,
The Hours 소설이든 영화든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가 될만한 내용도 있으며,

그 이전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될테니 주의하길 바란다.

Virginia Woolf and Vanessa Bell


2003.02.25 : The Hours (1) - revised in 2007.09.09. 

        영화의 구성을 뜯어보자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직접적으로는 [Mrs. Dalloway])의 그것과 비슷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인 이상이 이야기하던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사기법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은 모두 잘 알 것이다. [The Hours]에는 3명의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3명의 남자, 그리고 다른 3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이 9명의 등장 인물은 각각 1:1:1 혹은 3:3:3으로 대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도 하다. 3명의 여주인공들은 영화의 초기 씬에서는 별로 상관이 없는 듯 보인다. 그들이 모두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엔 꽃이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말이다. 첫 번째 여인은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 울프(Nicole Kidman). 두 번째 여인은 1951년 로스앤젤레스의 로라 브라운(Julianne Moore)이고, 마지막은 2001년 뉴욕의 클라리사 본(Meryl Streep)이다. 이들의 연관관계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요약하자면, 버지니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Mrs. Dallaway)]을 로라가 읽었고, 로라의 아들 리처드가 후에 병 들어 괴로워할 때 그를 돌보는 여인이 바로 클라리사라는 것. 이런 구성은 마치 의식의 흐름이 시점에 반영된 카메라 아이(Camera Eye)기법과 같다. [The Hours]는 이런 구성을 채택함과 동시에 3시대의 다른 인물의 스토리를 적절하게 엮어 배열함으로써, 세명의 주인공들은 마치 색깔이 다른 셀로판지들이 겹쳐지듯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이 구성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해가 전혀 달라지지만 일단 첫걸음을 떼어 보자면, 그들에게는 공통 분모가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계속 이런 공통점이 겹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 점이다. 이 공통점이 부각되는 곳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일단 첫 번째는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이 드는 하루의 일상'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기법은 굉장히 여러 작품에서 사용되고 이해하기도 쉽지만, 관객에게 복선을 암시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3명의 여인이 각각 아침을 맞는 장면을 함께 보여주는 것, 여기서 관객은 복선을 느끼게 된다. 이들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겹치게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랄까. [The Hours]는 세 여인의 삶에 전환점이 된 어느 하루를 그리고 있으며, 그 세 명의 이야기를 거의 1:1:1의 구조로 맞대응시키듯 진행한다. 

        두 번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The Hours]를 이해함에 있어 핵심적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3명의 여인 각각에게는 '남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 그들은 각각의 여인에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이유를 주는 존재라는 것. 하지만 여인들은 결국 그들을 모두 잃게 되었다는 것. 이들은 사랑의 대상, 혹은 연인이라기보다는 다른 특징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에게는 그의 남편 레너드가, 로라에게도 역시 그의 남편이, 클라리사에게는 병든 리처드가 이 '남자'에 해당하는데, 막상 그냥 들여다보고 있으면 별 상관 관계가 없는 인물들로 비춰질 수 있다. 사실 무리하게 대응시키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이 없기도 하니, 일단 이들의 존재를 각인시켜두고, 후에 함께 논의하기로 한다. 

        마지막 공통 분모는, [The Hours]를 본 관객 다수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의미를 잘 찾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바로 3명의 주인공이 키스한 여인들에  관한 것. 우리는 그 행위 자체에 물음표를 달아볼 수 있다. 아니, 뜬금없이 도대체 왜? 뭐 입맞춤이 사실 뜬금없는 성격의 것이긴 하지만..=ㅅ=; 버지니아는 조카들을 데리고 리치몬드의 자기 집을 방문한 그의 언니 바네사가 막 돌아가려는 참에 그녀와 키스한다. 그리고 로라는 그녀의 친구가 불임 문제로 병원을 찾아간다고 했을 적에,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클라리사는 좌절스러운 하루에 지쳐 침실로 돌아가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연인 샐리에게 키스한다. 도대체 이 키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The Hours]는 기본적으로 3가지의 삶을 서로 대응시키는 구조를 유지해나가고 이는 영화 전반에서 뚜렷히 드러나지만, 반드시 1:1:1의 대응은 아니다. 키스 씬이 등장하는 시간대만 봐도 각기 다르다. 로라가 가장 먼저, 조금 지나서 버지니아가, 그리고 엔딩에 가까울 때 클라리사의 씬이 나온다. [각주:2] 단순한 도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도발 역시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일단 그들 각각이 처한 환경에 주목해보자면, 버지니아는 리치몬드의 라이프스타일을 극도로 싫어한다. 런던행 열차가 오는 역에서 레너드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자기는 런던의 복잡함, 분주함을 사랑하고 이런 촌구석에 있는 것이 못견디겠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런던은 동경의 대상이며, 그 런던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는 바네사가 한없이 부럽고 자기를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또 소중한 그녀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무한한 슬픔이 그녀의 키스를 이끌어 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언제 사라지더라도 영원히 기억해달라는, 아니면 여기서 죽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삶에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바네사는 버지니아가 그리도 동경하는 런던에서 자식을 기르며 분주한 삶을 보내고 있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아 보이니까 말이다. 그런 누이를 보며 버지니아는 그녀의 삶을 동경하는 동시에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런던에서 산다는 것 자체는 동경했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여성상에 억눌려 사는 자신과 언니의 모습이 슬퍼서였을 수도 있다. 그녀들의 키스는 삶에의 몸부림이자 서로에 대한 어루만짐이라고 해야 될까. 

        로라가 그녀의 집을 찾아온 친구 키티에게 키스하는 장면도 약간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로라는 왠지 그녀가 자궁의 문제 때문에 병원을 간다는 말을 듣고 키티를 영원히 잃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그녀가 기억하는 친구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삶의 영기를 불어 넣어주기 위해, 그녀에게 키스를 한 것이 아닐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여인의, 마지막 삶에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또 동시에, 자신은 친구가 부러워하는 모든 것(자상한 가장, 안정된 가정과 일상, 아이 등)을 가진 행복한 가정주부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라도 했을까. 혹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시스템에 길들여진 키티에게 연민을 느꼈을까. 아니면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친구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세상 자체에 슬퍼진 것일까. 아마 지금 내가 굉장히 중요한 코드를 빠트리며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때 어린 리처드는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고 엄마가 집을 떠날 적에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결국 로라가 돌아오긴 했지만, 나중에 클라리사와 로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날로부터 4개월 후 리처드의 동생을 낳고 로라는 가족을 떠난다. 이미 그 날 어린 리처드는 심리적으로 엄마 로라를 잃은 것이다. 그런 리처드가 자라서 AIDS와 정신질환을 앓는 시인이 된다. "시인이 죽는다"는 버지니아의 말에서 암시 되었듯이, 그는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리처드를 돌보는 것에 그녀의 인생 거의 전부를 바쳤고, 그녀를 위한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리처드는 그런 클라리사를 자신에게서 해방시켜주고 싶어 "빛이 필요하다"며 블라인드 창을 다 걷어버리고, 창에 걸터앉아 클라리사의 ‘하루 일과’를 물어보고는, 그대로 떨어져 버린다. 클라리사는 그 후 도착한 로라와 이야기를 나눈 뒤 허탈한 발걸음으로 침실로 향하고, 그것을 지켜본 샐리가 따라 들어간다. 그런 샐리에게 클라리사는 키스를 하는데, 이것은 앞에 나온 두 여인의 키스들과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적어도 샐리는 10년을 클라리사와 함께한 연인이었지만, 바네사나 키티는 그런 위치에 대입시키기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통의 맥락에서 본다면, 리처드는 그녀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었고, 그런 그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때까지의 그녀의 인생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키스 역시 새로운 삶에의 의지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이젠 리처드를 돌보는 삶이 아니라 리처드가 바랬듯이,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동시에, 샐리는 클라리사가 리처드만을 돌보며 사는 동안 10년이나 함께 있어준 마음의 후원자이자 연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방황하는 자신을 계속 옆에서 지켜준 반려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발현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분명 다른 두번의 키스와는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다. 왜 이 키스가 맨 마지막에 배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는 3명의 여인 모두 잠자리에 들고, 강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독백이 이어진다.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가 강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유명한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읊는다. [각주:3] 한 여인의 죽음으로 시작한 영화가, 한 여인의 죽음으로 다시 끝맺음하는 형태랄까.  그 독백은 잠자리 인사를 나누는 로라와 클라리사의 딸의 모습에서 시작해서, 잠자리에서 생각하는 버지니아의 모습,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클라리사가 잠옷차림으로 복도의 불을 끄는 장면, 그리고 버지니아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일생에 있어서 전환기가 된 하루를 그리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란 작가 Mrs. Dalloway라는 작품을 시작한 그 날을, 로라와 리처드의 비극이 시작된 바로 그날을, 그리고 클라리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그 순간의 날을 그리고 있다. 모두 평범하게 시작했지만, 잠자리에 들게 되서야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날들을. 바로 그 시간(the hours)들을.

Laura Brown and Kitty


2003.02.28 : The Hours (2) - revised in 2007.09.09.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작품 [Mrs. Dalloway]가 [The Hours]의 아래에 쭉 깔려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버지니아가 소설의 첫줄을 떠올린다.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자기가 직접 꽃을 사야겠다고.” 동시에 1950년대의 로라가 그 줄을 읽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 날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선 클라리사가 “샐리, 내가 직접 꽃을 사야겠어.”라고 말한다. 사실 클라리사가 댈러웨이 부인과 겹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은 영화 전반에 너무도 많아서, 클라리사 = 댈러웨이 부인이 라는 공식을 놓치는 이들은 거의 없고 이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Mrs. Dalloway의 본명 역시 '클라리사 댈러웨이'이고, 이는 [Mrs. Dalloway]를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영화에서 친절하게 알려준다. [각주:4] 그러면 왜 리처드가 클라리사를 '댈러웨이 부인'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 항상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 [각주:5]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The Hours]가 [Mrs. Dalloway]에 바치는 오마쥬라는 것과, 1:1:1 대응 구도로써 세 여인을 엮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를 염두에 두면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초반에는 이런 구도에 충실한 듯 진행하여 관객들이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들어 놓고, 뒤로 가면 갈수록 조금씩 엇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엇나가는 박자는 후반부에서 전혀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내지만, 이를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엇박의 중심에는 리처드라는 인물이 있다. 어린 리처드가 심리적으로 엄마 로라를 잃은 그 날, 로라는 [Mrs. Dalloway]를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에 자신을 대입시킨다. (이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누구든지 책이나 연극, 영화를 보며 문득 주인공에 나를 대입시키거나 그를 잣대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로라는 자살까지 시도하고, 리처드는 그 날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에 실제 댈러웨이 부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는 [Mrs. Dalloway]로 인해 엄마에게서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의 작가와 흡사한 인생을 영위하게 되고, 작품의 등장인물 댈러웨이 부인의 도움을 받아 사는 셈이다. 1:1:1 대응의 구도에서 관객이 1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버지니아 = 로라 = 클라리사라 는 것인데, 의식의 흐름 기법은 굳이 이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진행한다는 것이 문제다. 처음에는 1:1:1의 구도를 각인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관객들이 충분히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지난 이후부터는 비틀어버린다. 다음은 그 비틀어짐에 대한 설명이다. 

        클라리사 = 댈러웨이 부인이라 했다. 그리고 로라 = 댈러웨이 부인인 것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1:1 구도가 성립하려면 버지니아 = 댈러웨이 부인이 되어야 하는데, 막상 그렇지만은 않아보이니 말이다. 물론, 로라가 댈러웨이 부인에 자신을 대입했기 때문에 로라 =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버지니아 =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볼 수 있긴 하다. 버지니아 역시 자신의 처지와는 반대인 댈러웨이 부인이란 인물을 창조해냄으로써 그에 자신을 대입시키려 했으니까. 그녀는 런던의 복잡함과 ‘살아있음’을 좋아했다. 파티를 여는 일은 가장 댈러웨이 부인다운 것이며, 그런 인물이 될 수 없는  환경에 사는 버지니아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대화에서 유추해보면, 그들은 그 날 이후 런던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인생을 빗대어 보면, 결국 런던의 삶은 그녀의 상태를 악화시켰고, 다시 전원의 삶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런던의 분주함과 활기참은 버지니아에게 삶의 이유와 활력을 주지만, 결국은 그녀에게 해를 입히게 되는, 슬픈 역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양이 너무 좋아 날아올랐다 추락해버린 이카로스 격이랄까. 따라서 버지니아는 엄격한 의미에서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다. 활기찬 생활을 하는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대리만족은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댈러웨이 부인을 그렸을 것이다. 

        잠시 여기서 뜬금없이, 리처드의 자살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클라리사가 약속된 3시 반보다 일찍 리처드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리처드가 “빛을 좀 더 들여야겠어.”라 며 블라인드를 다 뜯어내는 것을 보고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녀도, 리처드도, 이미 [Mrs. Dalloway]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클라리사는, 드디어 소설 속의 시인이 죽는 그 날이 오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를 막고 싶지만 막지 못하는, 자신의 하루 일과를 물어보며 슬금슬금 창틀에 몸을 걸치는 리처드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The Hours]는 버지니아가 Mrs. Dalloway를 구상하는 과정과, 그에 따라 어떻게 로라가 자살을 결심했다가 포기했는지, 또 리처드가 자살하게 되는지 등을 겹쳐 보여준다. 처음에 산책을 나간 그녀는 “그래, 그녈 죽이는 거야. 안될 거 없지.”라고 생각하지만, 언니 바네사와 조카 안젤리카를 옆에 둔 응접실에서 말한다. “그녀를 죽일 작정이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단다.” 또 기차역에서 레너드와 돌아온 그날 저녁, “누굴 죽여야 되는지 깨달았어요. 시인이 죽는 거예요.” 라 한다. 이미 리처드의 자살 씬을 본 후에 나오는 장면이기에 관객들은 이 '시인'이 리처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객보다 그걸 더 잘 아는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마지막 질문과 행동에 몸을 떨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리처드만 그 '시인'인가.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다시 논의를 이어 가기 위해 클라리사로 넘어가보자. 댈러웨이 부인으로 칭해지는 클라리사의 삶은 과연 활기찬가? 마치 그녀는 억지로 활발해 보이려고 하는 것 같다. 파티를 준비하는 것도 전혀 즐겁지 않고, 꽃을 사는 일도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클라리사는 버지니아가 동경하던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 뉴욕에 살면서 나름 활발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분명 알 수 있듯이, 그녀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오히려 버지니아가 느끼는 절망감과 우울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20세기 초반의 여작가가 추구하던 거의 모든 것을 지니고 사는 21세기의 클라리사도, 결국은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명제를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만, 버지니아와 버지니아가 창조한 캐릭터는, 그렇게 몇십년의 세월이 지나도 닮아있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되던 두 인물이 겹치며, 이면에 숨어있던 담론을 이끌어내는 순간이다. 이 담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버지니아 = 댈러웨이 부인일수도 있다는 것만 고려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Clarissa Vaughn and Sally Lester


2007.09.09 : The Hours, revisited. 

        개념이 없고 인생 경험이 부족해서, 2003년 작성 당시 굉장히 중요한 코드 2가지를 빼먹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사실 2003년 작성한 원본을 대충 수정만 해서 재포스팅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작업인데, 결국 [The Hours]를 처음부터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18살의 어린 나이고 사고에 깊이가 없었다지만, 그래도 논술로 입시까지 끝마친 상황에서 그렇게도 분석에 깊이가 없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다. 덕분에 전 파트에서 거대담론을 빼먹고 적느라 죽는줄 알았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그 코드를 통해 [The Hours]의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글을 적어보겠다. 

        첫 번째는, 절대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코드이고, 심지어는 너무나 뻔히 보이기조차 하는데, 왜 이걸 거론하지 않았는지 지금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튼 이 코드는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가장 간편한 단어는 '페미니즘', 그리고 '동성애'이다. 페미니즘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보편적 의미와는 다른 양상도 많이 띠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고, 또 페미니즘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엇맞는 부분이 많으니, 일단 '여성'을 염두해두고 작품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자.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일단 1:1:1이라는 구도를 다시 빌려올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어찌 되었든, 3명의 여인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산, 같은 영혼의 소유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시대는 20세기 초, 막 여성인권운동이 고개를 들 즈음이었고, 로라의 배경인 1950년대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어가지만 아직까지 전통적 주부상이 주류의 패러다임이던 시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시대의 전환기에,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의 삶을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와 바네사가 속해 있던 Bloomsbury Group을 포함해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버지니아 울프 역시 동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20세기이고 그들이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2001년의 클라리사만큼 사회적으로 당당하지는 못했을 것 아닌가. 

        로라 역시 직접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한발짝 물러나 생각해보면, 만약 그런 성향이 없었다면 키티와 키스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192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보다, 1950년대 '스텝포드 와이프'의 삶을 사는 로라가 더 억눌려있었는지도 모른다. 60년대가 되서야 히피와 여성인권에 대한 제대로 된 움직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로라의 불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종전 후 귀국한 참전용사 남편과 결혼하여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아메리칸 미들 클래스'의 삶을 살지만, 마음을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또 키티와는 결혼 후에도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래된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키티는 전형적인 50년대 미국 남자들이 좋아할 그런 스타일의 여자고,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만, 로라의 오랜 친구인 만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사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내가 The Hours (1)에서 한 설명보다 간단하고, 실제 작가의 의도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버지니아와 로라의 시대적 환경에 비하면, 클라리사의 배경은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역할 및 인권에 대한 인식도 앞의 두 시대보다 월등하고, 동성애와 AIDS도 아직 부족한 감이 있지만 수면 위로 올라온 시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클라리사도 행복해야 하는데? 버지니아가 동경하던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전통적 여성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을 분출할 수 있는 클라리사는 버지니아와 로라가 꿈꾸던 인생 그 자체이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드디어 작가의 거대담론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시대적 환경이 어떻게 변해왔든, 여성상과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든, 아직 자유로운 영혼들은 상처받고 있다는 것. 많이 나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개인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The Hours라는 제목을 잠깐 짚고 갈 필요가 있는데, 일단은 '그 시간들'이라는 뜻이다. 이 시간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클라리사가 그녀의 딸과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리처드와 함께 보내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난 그게 행복의 시작인 줄 알았어. 그렇게 시작했으니, 이후에도 행복은 지속되거나, 더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 때, 그 시간들, 그 때가 행복 그 자체였던 거야."라고 한다. 물론 클라리사가 이야기한 '행복의 시간'이란 이 작품의 the hours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 전반에서의 the hours란 애환, 슬픔, 혹은 그를 넘어선 희망의 시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성격이 어찌 되었든, the hours란 한 여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시간들을 의미한다. 또는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사랑하는 이, 혹은 의지하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이들과 보낸 시간들이 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특히 버지니아의 마지막 편지 구절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함께 평생을 와준 파트너로써의 레너드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니까 말이다. (파트 1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한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the hours란 일생에 있어 어느 한 순간이라기보다는, 전환점이 된 그 이후의 삶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다면 클라리사가 이론적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왜 행복하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전에 놓쳤다던 2가지 코드 중 나머지 하나를 마저 공개할 때인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리처드'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을 중심으로, 너무 뻔한데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담론이 숨어있었다. 이도 앞 뒤 다 짜르면, 리처드 = 버지니아 정도로 쓸 수 있을까. 리처드는 동성애, AIDS, 정신분열, 편집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시인이다. 많은 이들이 너무 '여인들'에만 집착하여 리처드가 상당히 버지니아 울프와 닮아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해버린다. 부끄럽지만 본인 역시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사실 여러 곳에서 암시되고 있었다. 리처드가 창틀에서 떨어져 내리기 전,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편지 구절("나와 당신이 함께 한 시간들")을 읊었다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근거다. 버지니아가 레너드와 '누굴 죽일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도 잠시 살펴보자. 이 장면이 리처드의 자살 장면 이후에 배치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처드의 자살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당연히 그 앞에 배치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가. 하지만 그 뒤에 왔다는 것은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인이 죽는다"는 말은 리처드이기도 하지만, 결국 버지니아 자기 자신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을까. 자신과 자신이 창조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캐릭터 중, 버지니아는 전자를 죽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시인의 죽음이란, 단순한 한 캐릭터의 소멸이 아닌, 자신이 너무도 아끼는 누군가(댈러웨이 부인)를 위한 희생으로 읽을 수 있다. 버지니아는 댈러웨이 부인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죽음을 구상했고, 리처드 역시 마찬가지다. 리처드 역시 댈러웨이 부인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버지니아 역시 실제로 레너드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강 속으로 걸어들어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실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지막 편지의 내용으로 추론해보면 그렇다.) 둘은 닮은꼴이지 않은가. 닮은 꼴을 넘어서, 리처드는 환생한 버지니아에 가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클라리사는 리처드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역시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라리사는 리처드에게 '뮤즈(muse)'였던 것이다. [각주:6] 리처드의 소설이 클라리사를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고, 클라리사가 리처드의 인생에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하지만 클라리사의 울먹임 속에서 우리는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리처드에게 뮤즈가 될 수는 있어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유대관계가 너무나도 깊어 연인으로 규정짓지 못할 어떤 교감이 있기에 그럴 수도 있고, 리처드가 병들고 약한 자신을 클라리사의 파트너로 허락할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결론은,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뮤즈였다는 것이다. 클라리사도 그런 그녀의 삶에서 의미를 찾았을 테지만, 리처드도 이제 더이상은 클라리사를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바로, 버지니아와 리처드, 댈러웨이 부인과 클라리사를 4자 대면시키면 우리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클라리사는 버지니아가 창조한 캐릭터, 댈러웨이 부인으로 대응된다. 그 댈러웨이 부인을 죽이려던 버지니아는, 결국 시인의 죽음으로 대신하게 된다. 그 덕분인지 반 세기 넘어 지나 그녀의 닮은꼴인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동경했던 그녀가, 실제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 클라리사도, 리처드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버지니아가 클라리사가 되었는지, 리처드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방법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건, 소멸된 버지니아의 기억은 [Mrs. Dalloway]라는 소설로 전해졌고, 자유로운 영혼을 놓아주기 위해 리처드는 버지니아의 길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 하지만 반 세기 전과는 다르게, 버지니아의 두 화신들은 하나가 소멸하여 나머지 하나로 흡수되지 않았을까. [The Hours]의 작가 Michael Cunningham은 20세기의 여성이든, 21세기 초의 여성이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듯 하지만, 결국 클라리사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었을까. 자유로운 여성의 영혼이 살아가기에, 아직 세상은 준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슬픔과 상실, 아픔의 시간을 넘어 인생을 직면하리라.

Always the love, always the hours..


Dear Leonard,
To look life in the face,
always, to look life in the face,
and to know it for what it is.

At last to know it,
to love it, for what it is,
and then, to put it away.
Leonard, always the years between us,
always the years,
always the love,
always... the hours... [각주:7]

  1. 본 포스트는 2007년 9월 9일 작성됨. [본문으로]
  2. The Hours에서 타임라인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펄프 픽션에서처럼 뒤죽박죽이 아닌, 정방향으로 흐르는 설정이기 때문에, 등장 시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극의 상황 역시 다르게 발전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3. “친애하는 레너드, 인생을 직면하기 위해서, 항상 인생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알고, 나중엔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쉽게 놓아 주기 위해서… 당신과 내가 함께한 그 많은 나날들, 그 나날들… 그리고 사랑… 그리고 그 시간들(the hours)…" [본문으로]
  4. 버지니아가 집필하는 원고에 Clarissa Dalloway라고 적힌 부분이 대문짝만하게 클로즈업 된다. 참고로 등장 인물 클라리사의 full name은 클라리사 본(Clarissa Vaughn)이다. [본문으로]
  5. 이 문장은 소설의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로라가 키티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유추할 수 있음. [본문으로]
  6. 뮤즈란 음악의 여신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예술의 영감을 주는 존재를 일컫기도 한다. [본문으로]
  7. 각주 3번의 해석을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