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 Movie: Rise and Fall of Idi Amin (1981)

MuzeWeek/Culture 2011.12.28 05:11

= Rise and Fall of Idi Amin Dada =


             Rise and Fall of Idi Amin (1981)은 1971년 군사 쿠데타로 Milton Obote 정권을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해 1979년까지 Uganda를 군부독재통치 했던 Idi Amin Dada의 정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그의 통치는 국수주의, 인권유린, 정치탄압, 인종차별, 사법 절차에 의하지 않은 학살, 친족중용주의(nepotism), 개인숭배, 경제재정적 오류 등으로 요약된다. Hitler in Africa라는 별칭을 얻은 이디 아민은 1977년부터 스스로를 "His Excellency, President for Life, Field Marshal Al Hadji Doctor Idi Amin Dada, VC, DSO, MC, 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in Africa in General and Uganda in Particular"라고 칭하였는데, 여기서 특히 "대영제국의 정복자"라는 타이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간다는 중앙 아프리카 지역의 Lake Victoria 북쪽으로 위치한 국가로 영국으로부터 1962년 독립하였는데, Amin은 국수주의적 외교행태를 보이며 특히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를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이라 부르기도 한 것은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통치를 크게 인권탄압적 독재, 인종차별적 국수주의로 나누어 분석한다.

              먼저 Idi Amin정권은 전형적인 인권탄압적 군부독재정권이었다. Milton Obote가 1971년 1월 2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Commonwealth 정상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도중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Idi Amin에게 우간다인들은 환호를 보냈고, 그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거를 열고 민정이양을 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 2월 2일, 그러니까 쿠데타 이후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스스로를 우간다의 대통령 및 최고군수통치자로 임명하고 우간다 헌법의 일부 조항들을 유예하겠다고 발표한다. 그 이외에도 자기 수하의 군인들을 정부기관 등에 임명하고 (기존의 내각 멤버들에게도 군사 규율에 따를 것을 명함), 사법제도 역시 전부 군사재판으로 대체했으며, 수도 Kampala의 대통령 집무실 역시 "전투사령부"등으로 개명하는 등 철저한 군사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그의 부관들은 게슈타포를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민권을 유린하였으며, 우간다인들은 1970년대를 군부독재의 폭정 속에서 신음해야 했다. 그는 오보테의 지지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그가 싫어하는 모든 형태의 집단들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했고, 그가 주도한 학살은 주로 인종, 정치, 경제적 특색을 띤다. ICJ, Amnesty International 등에 의해 추산된 Amin 정권에 의한 학살자 수치는 8만~50만 정도이다.

              그런 Idi Amin의 정권이 국제적으로 보낸 메시지는, 그의 정권이 지극히 국수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는 것이었다. 1972년 8월 그는 "경제 전쟁"을 선포하고, 유럽인들과 아시아인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 하는 동시에 우간다 시민권을 지니지 않은 모든 아시아인을 강제 추방한다. (이를 통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을 잃게 된 셈이다.) 추방된 아시아인의 대부분은 인도계였기 대문에 인도는 그 즉시 국교를 단절했고, 경제 전쟁의 결과 영국 자본에 의한 85개 기업이 국유화되었다. 이러한 와중 그는 아랍권과 소련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태인을 죽인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미국과의 국교는 이미 1973년 단절되었고, 1976년 이스라엘의 구출작전 Operation Entebbe에 의해 종결된 Entebbe 공항의 유태인 인질 사건은 아민 정권에 대한 국제적 비난의 강도가 높여 결국 영국 조차 손을 놓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지속적으로 전투력 강화에 착수하고, 1976년에는 수단 남부와 케냐의 중앙부, 나이로비의 일부 등이 원래 우간다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등 주변국들과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는 결국 리비아와 동독, 소련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외교관계를 잃게 되었으며 1978년 탄자니아를 침공하였으나 오히려 역공에 의해 정권이 와해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그는 온갖 기행과 잔인성을 바탕으로 우간다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아프리카 군부 독재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이디 아민과 유사한 형태의 독재정치 양상을 보여준 사례로는 먼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 معمر القذافـي)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디아민이 우간다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 몇 안 되는 지지자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래로 현재까지 리비아의 실질적(de facto) 국가 원수로서 행세하고 있는데, 그의 공식 칭호는 대령에 불과한 상태이다. 쿠데타 이후 스스로에게 최고 계급을 수여하는 일반적 관행과는 달리, 카다피 스스로의 말에 의하면 리비아는 "인민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거창한 칭호나 최고 계급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각주:1] 그는 1970년 수상(prime minister) 직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다가 2년만에 포기하고 현재까지 "형제와 같은 지도자이자 혁명의 영도자 (Brotherly Leader and Guide of the Revolution)"라는 칭호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칭호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수장을 겸하는 등 1인 독재의 실태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고, 개인숭배적 요소 마저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목민의 아들로 사막의 천막에서 태어나 Sirt에서 성장하였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군인이 된 후, 잠시 영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그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방하여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자유장교단을 구성했다.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9월 국왕 이드리스 1세의 해외 순방 중 쿠데타를 일으켰고, 혁명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군 사령관을 맡았다.[각주:2] 그 후, 철저히 반미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이탈리아인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음주를 금지시키고, 독자적인 직접민주제를 구상하였다. 한편, 중동 지역에 단일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에 따라 이집트와 아랍 연합 구성에 합의했으나,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추진한 평화 정책에 반발하여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0년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합방은 무산되었다.[각주:3]

               
그는 비동맹 운동에 참가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독재 정치, 인권 탄압, 테러, 핵실험 등의 의혹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유화한 석유로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를 국제 테러 단체에 지원한 의혹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괴팍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자주 가십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카다피는 또한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Saif al-Islam Muammar Al-Gaddafi)이 2006년 당시 자신과 자신의 정권을 신랄히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서 카다피는 서방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등 그 면모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그의 1970~1990년대에 걸친 정책적 모습은 이디 아민 등의 전형적인 기인적 독재자의 자화상을 닮아있다.

              다음으로 이디 아민의 사례를 보면서 북한의 김정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았고, 현재 아들 김정은으로의 후계구도를 굳히려 하는 등 이 시대에 남은 비민주적 독재자의 전형 중 하나로 손꼽힐 수 밖에 없는 인물이고, 공식 칭호가 국방위원장인만큼 군부독재적 성격도 띤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무렵부터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 이복 형제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 숙부 김영주와 이복 동생 김평일을 제치고 후계자지위를 확정 짓는다. 그리고 1994년 집권 이후 이들은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떠돌고 있으며, 계모 김성애 역시 정치적으로 숙청당했다.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그의 지위가 확정되었고, 여기서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각주:4]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 없는 자연재해와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 칭해진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정일 정권은 핵 프로그램을 강행해 국제 사회에 불안을 야기하였다. 이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국제 사회에서는 최대 300만명이 아사했다고 보고 있다. 2003년에 발표된 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300억 달러가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각주:5]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 그 결과 쌀값이 KG당 북한화폐 20원에서 북한화폐 600원까지 치솟는 참담한 결과물을 초래했다.[각주:6] 또한 2010년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하였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이에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언급하였다.[각주:7]

              
그는 주체사상의 이름으로 독재자에 대한 개인숭배를 정당화하고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을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북한 경제의 붕괴 및 북한 주민들의 인권 박해 현실을 외면하였다. 그에게 있어 최우선순위는 북한의 국가안보가 아닌 자신의 정권안보 및 후계 구도 정립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 21세기 초, 최악의 독재자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디 아민과 같이 기인적 행태보다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합리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지, 그 존재가 해당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가지는 함의는 유사하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국가를 희생시켰고, 개인의 탐욕에 의한 독재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2011년 12월 27일자 post script: 사례로 소개한 두 명 모두 현재 사망. 

  1. Kira Salak, "Libya: The Land of Cruel Deaths (Rediscovering Lybia)", (National Geographic Adventure, April 2005) pp. 30 [본문으로]
  2. "Bloodless coup in Libya", BBC News 20 December 2003 [본문으로]
  3. Aidan Lewis, "Profile: Muammar Gaddafi", BBC News, 28 August 2009 [본문으로]
  4. "北 김성애 치맛바람에 빨치산파, 김정일을..", 중앙일보 2009.06.04 일자 [본문으로]
  5. "North Korea: Starved of Rights: Human rights and the food crisi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Amnesty International, http://www.amnesty.org/en/library/info/ASA24/003/2004, 17 January 2004 [본문으로]
  6. 김성수, "北화폐개혁 실패, 박남기 黨재정부장 해임설", 서울신문 2010.02.04 일자 [본문으로]
  7. 주진, "여야, 北 3대 권력세습 한목소리로 비판", 아시아투데이 2010.09.28 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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