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L·E (2008) : 불편하지 않은 디스토피아의 진실.

MuzeWeek/Culture 2008. 8. 10. 23:26

오랜만에 어둡지 않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정신세계가 그쪽이랑 싱크로율 99%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리뷰 자체는 훈훈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미리 주의.) 다크나이트를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우울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면, 당신의 유일한 탈출구는 WALL·E (2008) 뿐이다. 참고로 다크나이크를 관람하기 전에 계획했던 the joker 캐릭터 비교와 비슷하게,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에 등장하는 우울증 로봇 마빈(Marvin the Paranoid Android)와 우리의 월·E를 비교하겠다던 야망은 여지없이 한 여름 밤의 꿈[각주:1]으로 끝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적어내려가겠지만, 아마 영화 그 자체만큼이나 유쾌한 글은 되지 않을 것 같다.

바퀴벌레 펫은 구하기도 힘들다던데..


WALL·E (2008)는 확실히 유쾌하다. 개그도 물론 아메리칸 센스지만 훌륭했다. SF 코메디라는 장르적 측면에서 보면 더할나위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백그라운드에 숨어있는 담론은 꽤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하고 있기에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다. 따라서 본 리뷰에서는 WALL·E가 귀엽네 개그가 일품이네 하는 뻔한 소리들보다, 이런 설정(settings)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분명 이 영화는 이러한 설정들을 무겁지 않게, 어떻게 보면 무신경해보일 정도로 가볍게 다루어서 관객들은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크게 2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물론 robotic romance(로봇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고, 두번째는 바로 디스토피아/유토피아 설정에 대한 것이다.

...이거 사실 납치 아님;?

WALL·E라는 지구 쓰레기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 식물 탐색을 위해 파견된 신형 로봇 EVE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가 아는 사랑의 정의란 결국,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을 녹음한 것 뿐. 기술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는 사랑을 알 수 없다. 사실 로봇이 사랑이라는 감정, 아니 애시당초에 감정 자체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SF세계에 끊임없이 있어왔던 논쟁거리이다. 그리고 SF의 장점은,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 작품관 안에 전제해버리면 그 자체가 진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일테지. (뭐 그래봤자 보통 대세는, 감정에 대한 지식을 '프로그래밍'해 주입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인간과 동일한 메카니즘으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정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분명, 로봇이 적어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느낄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기계가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설정은, 곧 전통적인 의미의 생명체의 정의를 부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WALL·E와 EVE는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되고 있다는 말이다.

무서운 EVE.

생(life, living)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 자체만으로도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철학, 인문학, 물리학, 생태학 등등)에 있어서 논쟁이 가능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살아있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단지 숨을 쉬면 되는걸까? 아니면 자기보호본능? 보통은 자기보호본능이 있는 모든 유기체를 생명체로 정의한다. 하지만 필자가 The Matrix Trilogy 리뷰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생명체를 정의하려면 마음(mind)의 존재여부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마음(mind)이란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어떠한 내적인 것의 총체 및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이 내적인 자유의지가 없는 유기체에게 사랑(love)이라는 개념은 이해불가능한 것 아닌가. 인간 중 몇몇도 사랑을 할 수 없는 감정의 사막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데, 기계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은 꽤 혁명적(신선하지는 않지만)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영화 WALL·E (2008)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개그, 감동 중 99%는 이 요소에서 발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작은 로봇들이 삶(Life)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개인적인 희망이라면, 이것이 과학기술적으로 혹은 인문학적으로 어떠한 논쟁으로 이어지기 전에, '함께 있고 싶은 이와 함께 별을 보는 훈훈함'으로 끝났으면 한다. (히치하이커와 다르게 이 영화는 헐리웃 센스가 듬뿍 묻어있기에 그럴 염려도 없지만 말이다.)

웃음은 감정의 얼굴이라고 했던가..

WALL·E (2008)는 생각보다 꽤 무서운 디스토피아(dystopia)관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살짝 귀여운 반전이 있다면, 쓰레기로 가득찬 미래의 지구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그럼 반문해보자. 700년 이상을 어느 거대 유통회사에 의해 만들어진 우주선 안에서 집단적 히키코모리처럼 살아가는 그 세상이 유토피아(utopia)인가. 겉으로 보기에 그럴지 모르지. 괜찮잖아? 모든 일은 로봇이 대신 해주고, 날아다니는 소파에 앉아 평생을 걱정 없이 사는 것. (...700년 동안 무슨 수로 에너지와 식량을 자가수급했는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다.) 그것이 인류가 바라던 진정한 미래 아니던가? 한 문장으로 말하면, 'sitting on our collective asses'다.[각주:2] 하지만 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 우리 자신은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더이상 인류가 진보하지 않는 것, 더이상 그들의 지식이 넓어지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는 것, 이것보다 디스토피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을까? 이미 그들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비되어 월·E와 EVE의 행위가 더욱 유기적 생명성을 얻게 된다.

잠깐만. 우주선이 디스토피아라면, 폭삭 망해버린 우리의 지구는 유토피아가 되버리는걸까? 놀랍게도 그렇다. 인류의 거대자본과 무차별적 소비문화가 남긴 쓰레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지구는 디스토피아가 아닐 뿐 더러, 오히려 유토피아에의 희망을 간직한 곳이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매개이자 상징은, '부츠 속에 담겨 이리저리 치이던 어느 식물의 새싹'이 되겠다. 관객들은, "어쩌면 선장이 저 식물을 일부러 없앨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지 모른다. 그 본질이야 어쨌든 평생을 놀고 먹던 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구라는 아수라장(hellhole)으로 돌진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미래를 살아갈 유일한 방법은, 그 쓰레기장으로의 귀환 뿐이라는 것을. 이는 사실 꽤 상징적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류의 유산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발전해간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은, 선조들의 잡동사니를 밟고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 아닌가. 그것은 분명 오류로 가득찬 것일 수도 있고, 부끄러운 역사일 수도, 아니면 단순히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과거의 유령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선장님 옷걸이 좀 짱인듯.

혹자는 이 영화가 환경 문제에 대한 의식이 너무 안이하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지구로 돌아온 인류가 식물을 재배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능"식의 결말을 냈다고 말이다. 물론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 맞게, 가볍고 쾌활한 헐리웃 센스로 넘겨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표면적 디스토피아의 함정에서 벗어나 바라본다면, 그것은 꽤나 훌륭한 선택이었다. (물론, 훈훈함도 잊지 않았고.) Buy 'n Large(BnL)로 대표되는 미국식 라이프스타일의 전형에 의해 운영되는 인류의 미래. 지구 전체를 자신들 부끄러움의 찌꺼기로 뒤덮고 우주로 도망간 아메리칸 드림. 그렇게 도망가서조차 정신 못차리고 놀고 먹는 'sitting-on-my-assism'. 이 모든 것이 WALL·E의 앙증맞음 뒤에 숨어 있는 이 영화의 메세지다. 어떤가, 이 작은 로봇이 인류보다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 유쾌한 작은 생명체들의 모험기 속에 그려진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내가 웃은 그 웃음은 개그에의 동조가 아닌, 자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유토피아라는 설탕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알아도 모른척 다가가는 것인가.

하지만 오늘만은 신경쓰지 않을란다. 이 유쾌한 영화를 보면서까지 그런 우울한 생각은 하기 싫다. 나도 오늘만큼은 월·E처럼, 소중한 누군가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그 소박한 삶을 꿈꾸고 싶다.
When you open your eyes, when you gaze at the sky..
When you look to the stars as they shut down the night..
You know this story ain't over.

당신이 눈을 뜰 때, 당신이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밤의 문이 닫히면서 별을 올려다 볼 때..
당신은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테죠.

Avantasia - The Story Ain't Over.

  1. 전문용어로는 '아시발쿰'이라고 함. 당신의 교양을 위해. [본문으로]
  2. ...이건 참 내가 써놓고도 한글로 해석하기 어렵다. 재미없게 해석하면, '평생 놀고 먹는 것'정도. [본문으로]